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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며생각하며>23.동국大 역경원장 金月雲 큰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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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광릉(光陵)에는 세조(世祖)이유(李.1417~1468)가 묻혀 있다.그는 권력에 미쳐 조카를 위협해 왕위를 빼앗고는 급기야 폐위된 조카를 죽였다.그러나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좋은 정치에 힘 썼다.나라 잘 다스리려는 정열에 불탔고 그 방법을 찾아내는데 열심이었고 실행하는데 과감했다.그러자니 신하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켰다.자신도 공부를 많이 했다.동갑내기였던 신숙주(申叔舟)와는 악한 일,선한 일 양쪽 모두에서 공부하는데 공범자였다. 세조는 51세를 살았다.왕 노릇은 13년 했다.왕자 시절에 이미 그는 부왕(父王)인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석보상절을 그때 처음 나온 한글로 번역했다.새 사조 좋아하고 부처님 잘 받드는 청년이었다.부처님의 큰 슬픔(大悲.karu na)에 귀의하는 일에서 조차도 그는 글과 공부쪽을 택했다.법화경.금강경등 수많은 경전을 직접 필사(筆寫).교정.번역.간행하는데까지 글에 대한 그의 열심은 뻗쳤다.
권력을 탈취하려고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지않았던 그는 말년을 천벌이라 할 병마(病魔)가 내린 극심한 고통 속에서 보냈다.그가 죽은 이듬해 그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로서 광릉에 봉선사(奉先寺)를 지은 것은 그의 과수댁 정 희왕후 尹씨의 발원(發願)이었다.봉선사가 그 후 5백년 넘어 지금까지 禪보다 敎,선사(禪師)보다 경사(經師)중심의 교종본산 도량(道場)으로 계승되어 온 것에는 세조의 이런 호학(好學)한 인연의 가닥이 매여 있다.
열반제일(음력 2월15일)을 며칠 앞두고 나는 이 절로 김월운(金月雲)큰 스님을 찾아가 만나는 행운을 어렵사리 가졌다.그의 시간을 얻어 내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자기의 모든 날,모든 시간을 부스러기 남지 않게 잘 다듬어 부처님앞에 공양으로 이미 드린 다음이기 때문일게다.그는 동국대학교 역경원장으로서 고려대장경 전부를 한글로 번역.교정.간행하는 일을 몸소 하고 있는 것을 비롯,12년전부터 불교통신강좌를 열어교재 집필에서 시험문제 출제 채점 을 직접하고,「불경서당」을 열어 강의하고,여름방학때면 어린 학생들을 모아 불교 임간(林間)학교를 운영하고,여기저기에서 열리는 법회에서 법문도 해야한다. 글이 귀하다는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어쩌다 글 많이 아는 그가 해야할 일은 너무도 많다.그날도 그는 용인에 있는 어느 절에 가서 열반경 법문을 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오히려 오가는 길에 불가불 흘릴 시간의 자투리를 모아 불신자(不信者 )인 나와의 면담에 쪼개줄 수 있었던 것이었음을 그후 알게 되었다.
그가 기거하는 이 절의 東별당 내부 모습은 16평짜리 아파트와 흡사하다.거실 한 모퉁이는 부엌 노릇을 하고 한쪽에는 화장실이 있다.거실을 중심으로 방 둘이 마주 보고 있다.하나는 그가 쓰고 똑같은 크기의 다른 하나는 관계를 물어보 지는 못했으나 아마 그의 시봉승(侍奉僧)이라고 생각되는 스님이 쓴다.거실은 4평이 될까 말까,이곳은 재가(在家).출가(出家)누구든 원하는 사람이면 그의 경문 강의를 들을 수 있는「불경서당」이다.
수인사에 곁들여 그가 말한다.
『요즘은 중 얘기라 하면 세상과 동떨어진 소탈함,깨끗하고 큰방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관련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던데,나는 이렇게 좁은 방에서 책이랑 공책이랑 지저분하게 해놓고 살고 있고 姜선생하고 이야기하면 신문에 불교 이야 기가 묻어나가서 포교나 좀 될까하는 욕심이 나서 딱 자르지 못하고 이렇게만나게 되었는데,이런 것도 잘못 되면 허욕이 될수도 있고,허욕가지면 판단이 흐려지고 나는 이래서 사실 아랫절 중도 못되고 윗절 중도 못되고.선비도,농사꾼도, 장사꾼도 아니고.
원래 중이란 건 옛날로 치면 고등 기생이오.백성은 순사한테 뜯기고,순사는 기생한테 뜯기고,기생은 또 중한테 뜯겨요.』 다스름이라는 것이 있다.우리나라 음악에서 본격적 연주에 앞서 음률을 한번 고르기 위하여 연주하는 맛배기 악곡 연주를 다스름이라고 한다.다스름은 특히 청중을 위해 비음악적 시간을 음악적 시간에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월운 스님의 이 말은 자기를 찾아온 한 속객 기자의 마음을 산문 밖에서 산문 안으로 안내하되다소 당황도 시키고 다소 안심도 시키는 다스름이다.그의 말이 계속된다.
『따디미라는게 있습니다.승려 복장을 한 사기꾼입니다.용하게 무슨 걱정거리 있는 집을 알아내지요.액운이 있어서 그러니 그것을 자기가 제거해주겠다면서 접근합니다.처음에는 쌀 한숟가락,성냥 세개비… 이런 하찮은 것만 골라서 달라고 해요.
안심을 시키지요.며칠 뒤 다시 와서는 기도를 해보니 부처님 말씀이 댁에 있는 금은보화가 덧났다고 한다면서 패물을 모두 한데 모아 단지 속에 넣어놓으라고 합니다.잠깐 부엌에 가서 냉수한 사발을 떠다달라고 해 놓고는 그 사이에 단지 속의 패물을 슬쩍하고는 그대신 작은 돌멩이를 넣어 놓습니다.사흘동안 열어보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해놓고 떠나간 그 따디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요 너머 절에 있는 일운(日雲)이라는 중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바람에 물건 잃어 버린 사람은 발음이 비슷한 이月雲을 찾아 옵니다.내 얼굴을 보고서야 사람이 다르다는걸 확인하고는 오직 도둑 못 잡게 된것만 한탄하면서 돌아가지요.』 월운 스님은 젊었을 때 동래 범어사 하동산(河東山) 스님을 모시고 참선에 몇해를 용맹정진하며 보냈다.그는 강승(講僧)쪽이기는해도 선승(禪僧)도 겸한 이른바 쌍수(雙修)다.따디미를 주제로한 그의 이 이야기는 드디어 나를 향해 하 나의 자그마한 공안(公案)으로서 내밀어진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옛날부터 따디미 피해는 많이 있어 왔지요.벼슬 살러간 양반아낙 접근한 것도 따디미들 짓이었고요.姜선생네 진주 姜씨도 양반이라고 하지만 스님들 자손 많을거요.』 공안 또는 화두(話頭)라고도 하는 것은 선종(禪宗)에서 도를 깨치게 하기 위해 내는 과제다.쉬운것부터 어려운 것으로 나아간다.월운스님은 나에게『당신은 姜가가 아닐 수도 있다.당신은 어떤 따디미의 피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 이다.나는 어릴 때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다 기른 아이란 말을 하도 많이 들었다.姓의 진실은 유전(遺傳)의 진실과 일치할 필요가 없다.이제 초로(初老)에 들어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화낼 일은 아닐터 .내쪽에서『그렇다면 스님은 日雲입니까,月雲입니까』 이렇게 되묻지는 물론 않았다.「姜가라고 불린다고해서 姜가는 아니다(謂姜非姜)」라고 그가 말한 것은 이 말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저들 해 구름이나 나 달 구름이나 같은 구름이다(被日雲 此月雲)」라는 말 속으로 나를 초대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고 나는 생각했다.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덕분에 나는 내 자신 불교인처럼 느끼면서 이 말을 듣는다.
***국교졸업이 전부 『일반인들 불교 보는 시각이 달라져야겠는데,그 원인은 실은 불교인들에게 있습니다.불교의 비참한 현실이지요.불교인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승려들이 제일로문제라.맘대로 중이 되고 맘대로 왔다 갔다 하고.조계종만 있는것도 아 니어서,여기서 중 안시켜주면 다른데 가서 계를 받았다고 하고.』 그는 을사생(乙巳生),올해 67세다.경기도 장단의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광복이 되자 집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38선이 생겼다.학교는 국민학교 졸업이 전부다.어릴때부터 한문을 읽었다.그가 집을 나온 것은 18세때,사서(四書)는 완전히줄줄 외울 정도였고 삼경(三經)가운데 시경(詩經)은 떼었고 서경(書經)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그가 집을 나온 이유는 두가지,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것과 밤이면 남북 군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불탄이 머 리 위로 씽씽 날아다니는 그곳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그는 한문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 가서 글선생을 해서 살리라고 작정했더라고 한다.그러다가 남해 화방사(花芳寺)까지 어쩌다 발길이 닿았다.그 절의 여러 스님들은 이 한문 좋은 떠돌이 젊은이를 상좌로 데리고 있고 싶어 중 되라고 권했다.뿐만 아니라 자신도 불경을 처음으로 읽어보니 마음에 그렇게 들었다고 한다.스님들이 의론을 정하기를 이런 젊은이는 자기네 밑에 둘것이 아니라 당대최고의 학승인 봉선사 운허 이학수(耘虛 李學洙.1892~1980)스님에게 인연을 맺어 주기로 했다.얼마 안 있어 6.25전란이 터지는 통에 운허스님에게는 편지로 허락만 받아두고 한참을동래 범어사에서 지내기도 하다가 몇년 지나서야 봉선사로 와 운허스님 제자로 들어갔다.운허스님은 63년 동국역경원을 창설,80년 입적할 때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약4분의3을 우리말로 옮겼다.운허의 제자 월운이 이 역경 작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운허스님 제자로 월운 스님의 말.
『내가 오늘 법문한 열반경은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을 기록한 것입니다.부처님은 도를 깨친 다음 자신에게는 생사가 끝났다고 말씀하셨어요.그후 45년간을 설법하시다가 어느날 갑자기 당신이석달후면 열반에 드실 것을 선언합니다.제자들이 흔 들리기 시작합니다.생사가 끝난 부처님이 다시 열반에 드신다는 것은 무엇이며,부처님이 안계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제자들을 불안하게 했습니다.부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육신이란 왔으면 가는 것이 영원한 모습이다.이런 인연의 법칙을 알면 나를 보게된다라고.화장하고 나온 배우 같은 화신불(化身佛)로서의 역할이 끝나더라도 본래 모습의 나인 진리,즉 법신불(法身佛)은 영원하다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내가 열반한 다음에는 계율(戒律)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불교인들은 이런 부처님의 진리,부처님의 계율을 읽어야 합니다.부처님의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은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의 가르침을 불자들에게 읽히고자 하는 것이오.이 사업에 정부도 일부 돈을 대고 교단도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마는,비참한것은 스님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는데 교단은 가난해서 자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부끄러운 일입니다.가장 좋기는 불교인들이 경전 읽기를 서원하고 너도 나도 우리 말로 번역된 경전을가정마다 사놓고 읽게되는 것이겠지요 .』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기회가 있으면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의 불교서당 강의를 염치없이 청강하러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세조가 권력에 미쳤다면 우리는 돈에 미쳐 있는 것은 아닐까.그보다 우리는 모두 따디미 이거나 아니면 따 디미에게 속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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