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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82. 뜻밖의 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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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필자(맨 오른쪽)를 위해 가족 음악회를 연 기타리스트 야마시타(왼쪽에서 둘째)와 작곡가인 그의 부인(맨 왼쪽).

올해 47세인 야마시타 가즈히토 (山下和仁) 는 음악적으로 탄탄한 경력을 쌓은 일본인 기타리스트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과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기타로 연주해 ‘마법의 손’ 또는 ‘기타의 신’으로 불린다. 그는 2005년 내한 공연 때 수많은 기타 팬을 불러모았다.

그런데 1년 뒤 야마시타가 아무도 모르게 한국에 온 적이 있다. “동남아로 가족 여행을 가는 길인데 선생님을 꼭 뵙고 싶어 들렀습니다.” 나는 그의 요청에 따라 국립국악원의 방 하나를 빌렸다. 야마시타는 이 방에서 가족 음악회를 열었다. 청중은 나뿐이었다. 그의 부인은 작곡가이고, 네 자녀는 모두 기타를 연주한다. 일가족이 나 한 사람을 위해 즉석 음악회를 연 것이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일본의 기타리스트가 내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뜻밖의 팬들을 만났을 때 그 기쁨은 두 배로 커진다. 한번은 읽던 책 속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미국인 현각 스님이 쓴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이다. 그는 수도 장소로 한국의 사찰을 선택한 주요 이유로 내 가야금 소리를 꼽았다.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 같았다.

법정 스님이 쓴 수필에도 깊은 산속에서 내가 작곡한 ‘비단길’을 듣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글들을 읽었을 때까지 나는 두 스님과 일면식도 없었다. 음악만으로 우리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그 뒤 기회가 생겨 법정 스님과 같이 차를 한 잔 했고, 현각 스님과는 나의 연주 무대 뒤에서 만났다.

이처럼 나와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사람들과 음악으로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세계 곳곳에서 했다. 미국의 산타크루스에서 연주할 때 만난 무용가 탠디 빌도 그런 인연을 맺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산타크루스는 연중 절반이 가문 곳이다. 그러다가 10월 말쯤 첫 비가 온다. 탠디 빌은 “35년 동안 첫 비가 오는 날에는 당신의 ‘가을’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항상 맨발로 다녀 발바닥이 시커먼 괴짜 무용가 탠디 빌은 산속 기차역 건물을 개조한 집에서 살았다. 집 마당에는 녹슨 기찻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날 산타크루스 주민들이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사냥하러 가던 길로, 지금은 그 철로만 횅댕그렁하니 남아 있는 것이다.

탠디 빌에게 내 음반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1965년 하와이에서 나온 LP를 손에 넣었다고 했다. 첫 음반을 외국에서 내고 뜻밖의 팬을 여럿 얻게 된 셈이다. 외국에 나가 연주할 때 이들은 곳곳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다. 덕분에 긴 연주 여행도 외롭지 않았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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