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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공부’ 푹 빠진 63세 여중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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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박영선씨(왼쪽에서 둘째)가 9일 울산시 남목중 교정에서 신입생 후배들을 만나 학교생활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울산=이기원 기자


 “배우니 신나고, 수다 떠니 즐겁고… 매일 학교만 갔으면 좋겠어요.”

9일 울산시 서부동에 있는 79㎡ 크기의 한 빌라. 앳된 목소리에는 겨울방학 동안 헤어졌던 급우들을 만나는 날(개학날·12일)을 코앞에 둔 설렘이 묻어났다. 현재 울산시 남목중 1학년에 재학 중인 늦깎이 중학생 박영선(63)씨. 교장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위이고, 급우보다는 쉰살이 더 많은 할머니다. 박씨는 “가정형편 때문에 50여 년 전 중단했던 학창시절을 이어가는 재미에 빠져 아플 틈도 없다”고 말했다.

가난한 농부집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6·25 전란에 두 오빠를 잃는 바람에 초등학교 4학년 1학기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학창시절로 되돌아온 것은 3년 전 친구의 손에 이끌려 주부 자원봉사자들이 가르치는 동광학교(야학·울산 양정동)에 나간 게 계기였다. 아들(28·회사원)과 남편(66·퇴직 공무원)의 응원 속에 1년6개월 만에 중학교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어 울산시교육청에서 일반 중학 배정을 받았다.

남목중 박국이(58) 교장은 “그 연세에 며칠 다니다 제풀에 꺾일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손자·손녀뻘 급우들에게 배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귀감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박씨는 교복 차림에 하얀 배낭 가방을 메고 아침 일찍 등교해 맨 앞자리에 앉아 자율학습도 하고, “박영선” 하고 출석을 부르면 “네”하고 큰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이 다른 학생과 다르지 않다. 영어시간에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곧잘 손을 들어 질문·발표도 하고, 체육시간에 뜀박질·구르기를 해도 빠지거나 꼴찌를 하는 법이 없었다. 지난해 개교한 남목중에는 8개 학급에 남녀 학생 249명이 다니고 있다.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입학 직후부터 집 부근의 종합반 학원에 등록해 다니고 있다. 이번 겨울방학 땐 구청에서 주관하는 컴퓨터 강좌를 2시간씩 듣고 음악학원에서 악보 보는 법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박씨는 “음악·컴퓨터는 검정고시 준비 때 배우지 못한 과목이라 기초가 달려 수업시간 때마다 자존심이 상해 죽을 뻔했는데 방학 중 꼭 만회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반에서 환경미화부장까지 맡고, 학교 금연동아리에 들어가 청소년의 흡연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도 해요. 학생지도에 큰 힘이 되어 줍니다.” 담임 정종철 교사의 평가다.

쉬는 시간이면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는 데도 빠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호칭은 “왕언니” “왕누나” “할매(할머니)”. “친구들 간에 다툼을 벌이다가도 왕언니(박씨)가 시비를 가려 주면 금방 화해가 된다”고 학생들은 전했다.

박씨의 늦깎이 인생은 중학 공부뿐 아니다. 42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늦둥이였고, 혼기를 놓쳐 37세에야 새댁이 됐고, 아들 역시 38세에 난산으로 낳은 늦자식이다. 박씨는 남은 삶에 대한 꿈이 있다. “나중에 가정 환경이 어려워 공부하기 힘든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고 싶어요.”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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