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바루기] 설을 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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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할머니가 사 주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싶어 설날을 손꼽아 기다린 민지. 날이 밝자마자 원피스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섰다. 섣달 그믐날 밤 잠들면 눈썹이 하얘진다던 오빠의 말과는 달리 눈썹도 그대로였다. 입가에 방긋 미소가 떠올랐다. 차례를 지낸 뒤에는 곱게 설빔을 차려입고 친척집에 세배하러 갈 작정이다. 두둑하게 세뱃돈을 챙길 생각에 벌써 가슴이 콩닥거렸다.”

설날 아침, 민지의 행동을 ‘세다’ ‘새다’ ‘쇠다’란 말로 나타낸다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 설이 며칠 남았나 날짜를 세어 보는 민지, 날이 새자마자 거울 앞에 선 민지, 잠들 때까지 눈썹이 세지 않을까 걱정하는 민지, 세배하러 다니며 설을 쇠기로 한 민지로 각각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단어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세뱃돈을 새어 보니 장난감을 살 만큼 충분했다” “예전엔 설이 가까워지면 설빔을 짓느라 밤이 세도록 잠 못 드는 어머니가 많았다” “명절엔 머리칼이 허옇게 쇠어 버릴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주부가 늘고 있다” “대부분 구정에 설을 센다고 답했다”와 같이 사용해선 안 된다. 각각 ‘세어’ ‘새도록’ ‘세어’ ‘쇤다’로 고쳐야 맞다.

‘세다’는 사물의 수효를 헤아리거나 꼽다, 머리카락·수염 따위의 털이 희어지다는 의미 등으로 쓰인다. 날이 밝아 오는 것은 ‘새다’, 명절·생일·기념일 같은 날을 맞이하여 지내는 것은 ‘쇠다’라고 한다. 간혹 “음력으로 생일을 쇄다”라고 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쇄다’란 단어는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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