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스토리] 대한민국 스포츠특별시 태릉선수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살짝 들여다본 핸드볼 훈련장. 때에 절은 공 하나가 눈길을 잡았다. 얼마나 많이 던졌을까. 얼마나 많은 땀이 배었을까. 닳고 닳아 꼬질꼬질한 공, 세상에는 더러워서 아름다운 것도 있다.

국가대표 여자 핸드볼팀이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일본과의 재경기를 앞두고 있던 지난달 25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불암산 기슭에 있는 태릉선수촌을 찾았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핸드볼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성공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던 상황 때문일까요. 영화 속에서처럼 남자 고등학교 팀과의 연습경기를 준비하며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긴장한 선수들을 배려해 ‘취재 금지령’도 내려졌다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습장으로 슬며시 들어서는 기자를 발견한 임영철 감독이 버럭 소리를 지르네요. “여기 누가 기자 들여보내랬어! 빨리 내보내!!”

다행히 29일 일본을 이긴 핸드볼 국가대표팀 아줌마 선수들은 함박웃음과 함께 태릉으로 돌아온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천재’들만 모인다는 그곳,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본다는 선수촌 생활. 그곳은 지금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함성이 우렁찹니다. ‘운동-식사-운동-식사-운동-식사’가 하루 일과인 선수들을 만났습니다. 별★들의 땀에 젖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글=이영희·홍주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영하 15도 추위에 “덥다, 더워”

지난 25일 오전 6시, 서울의 기온은 영하 9.5도였다. 태릉선수촌 대운동장의 온도계는 영하 1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딩~동~댕~동~ 벨이 울리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오늘 아침 온도가 영하 15도로 실외 에어로빅은 취소합니다. 아침 훈련은 종목별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남녀 유도 선수 40여 명이 운동장으로 뛰어나왔다.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몸을 풀더니 동료 선수들을 등에 지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가 하면 두 명씩 얼싸안고 기술훈련에 들어갔다. “추운데 실내에서 훈련하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에 “유도팀은 밖에서 합니다”라고 안병근 감독이 짧게 답했다. 어느새 선수들의 몸에서 허연 김이 피어 올랐다.

허가받은 박태환, 김연아

1966년 문을 연 태릉선수촌은 지난 42년간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를 상징해 온 장소다. 선수촌 정문에는 ‘가자! 베이징으로, 이루자! 신화창조’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현재 정부가 국가대표를 양성하고 있는 종목은 2007년 기준으로 총 44개 종목에 선수 1184명이다. 그중 태릉선수촌 내 훈련 종목은 21개 종목(체조, 탁구, 역도, 펜싱, 태권도, 배구, 유도, 농구, 수영, 핸드볼, 복싱, 배드민턴, 우슈, 레슬링, 양궁, 육상, 하키, 볼링, 빙상, 아이스하키, 컬링)이다. 나머지 종목은 촌외 훈련을 한다. 현재 선수촌에 입소해 있는 선수는 250~300명. ‘국민스타’로 떠오른 수영의 박태환과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는 외국에서 개인훈련을 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은 8월 8일 시작된다. 아직 190여 일 정도 남은 셈인데 아직 올림픽 진출을 확정짓지 못한 종목이 많다. 올림픽 출전권을 딴 16개 종목도 대부분 쿼터만 정해졌을 뿐이다. 올림픽 엔트리 선발을 앞둔 지금 선수촌엔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감돈다. 특히 유도, 양궁 등 우리 선수끼리 메달을 다투는 종목은 더욱 그렇다. 양궁은 최근 여섯 번의 올림픽에서 총 22개 금메달 중 14개를 가져왔다. 여자선수의 경우 다섯 번 중 네 번을 우리 선수끼리 결승전에서 만났다. ‘자체 평가전이 곧 결승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선수들 간의 경쟁의식은 당긴 활 시위처럼 팽팽하다.

식욕과의 싸움

선수촌의 일과는 ‘아침 훈련-식사-오전 훈련-식사-오후 훈련-식사-개인 훈련-휴식’으로 아주 간단하다. 아침식사는 7시부터다. 워낙 운동이 힘든 만큼 선수들의 하루 권장 칼로리는 일반인들의 2배인 하루 5000㎉다. 아침과 저녁은 한식, 점심은 양식이다. 1인당 하루 식비는 2만3000원 정도 든다. 뷔페식으로 되어 있어 자신이 먹을 양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식이조절 역시 훈련의 일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유도, 레슬링, 태권도 등 체중 조절을 해야 하는 선수들이 먹고 싶은 데도 참는 것을 보면 안쓰럽다고 식당 직원들은 말한다. 가냘픈 몸매의 10대 여자 체조선수들이 다이어트 하는 모습은 무엇보다 애처롭다.

저녁식사를 마친 7시30분 이후는 자유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각자 훈련을 하거나 선수회관에 있는 도서관, 노래방, 어학실 등에서 개인시간을 가진다. 선수촌은 기본적으로 전원합숙이 원칙이지만 주말이나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감독의 허가를 받아 외출이나 외박을 나갈 수 있다. 선수촌 내에서는 술, 담배, 도박 등이 금지돼있다. 이를 어길 경우 외출, 외박 금지, 심할 경우 퇴촌 등의 징계를 받기도 한다.

찬밥 종목, 더운밥 종목

선수촌 밖에서는 야구, 축구, 농구 선수들이 인기스타지만 선수촌 내에서는 메달 유망 종목 선수냐 아니냐로 선수들의 대접이 달라진다. 일단 메달을 딸 가능성이 높은 종목일수록 선수촌을 더 오래 쓸 수 있다.

올림픽 성적이 좋거나 전략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는 종목 순으로 중점지원 종목, 정책지원 종목, 우선지원 종목, 일반지원 종목으로 나눠진다. 양궁, 배드민턴, 복싱, 사격, 유도, 역도, 레슬링 등 13개 중점지원 종목은 2008년 훈련일수가 230일 내외다. 육상, 수영 등 정책지원 종목은 210일, 핸드볼, 하키, 사이클 등 5개 우선지원 종목이 180일, 프로 종목을 포함한 30개 일반지원 종목은 130일이다. 선수들은 입촌 기간 내 하루 3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같은 종목의 선수들끼리 사이가 좋을 것 같지만 사실상은 그렇지 않다. 선수촌 관계자들은 “특히 선수들끼리 경쟁이 심한 개인 종목의 경우 다른 종목의 선수들과 단짝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한다. 그래서 개인 종목 선수들은 팀끼리 뭉쳐 함께 운동하고, 메달을 따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구기 종목 선수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문성길의 21분 기록

영화 ‘우생순’에는 선수촌 시절 연인 사이였던 혜경(김정은)과 승필(엄태웅) 커플이 등장한다. 드물긴 하지만 태릉선수촌에서 ‘눈맞은’ 커플은 있다. 현재 은퇴한 커플 중에는 유도의 김병주-김미정, 배드민턴의 김동문-라경민, 탁구의 김택수-양궁의 김조순 등이 알려져 있다. 영화 속에서 혜경과 승필이 대결을 펼치는 불암산 달리기는 요즘도 매주 금요일 오후 2시30분에 열린다. 태릉선수촌 운동장에서 인근 불암산 헬기장까지 편도 4.5㎞의 거리를 뛴다. 역대 최고는 권투의 문성길이 세운 21분대 기록이다. 과거에는 전 종목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참가했지만 지금은 자율 참가가 원칙이다.

영화 속 선수들이 한약을 먹었다가 감독에게 혼나는 장면도 실제로 일어난다. 선수촌 자체 검사뿐 아니라 반도핑국제기구 등에서 수시로 들러 도핑검사를 실시한다. 그래서 각 훈련장 벽에는 ‘마황, 초마황, 백약자, 아편, 구골수피’ 등 도핑검사에서 금지된 한약재의 이름이 커다랗게 적혀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핸드볼팀의 아줌마 선수들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악착같이 했다. 이광현 훈련 담당 지도위원은 “영화 속 웨이트 트레이닝 장면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독하게 해 나중에는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말렸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새로 부임한 감독이 과학적인 훈련을 하겠다며 선수들의 동작을 카메라로 찍는 장면은 다소 과장됐다. 김용 스포츠의과학팀장은 “현재 태릉선수촌에는 훈련장 곳곳에 촬영용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며 “영화 속에서처럼 일부러 포즈를 취하지 않고도 누구나 필요할 때 자신의 훈련 장면을 찍어 이를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영희 기자

전 태릉선수촌 체력지도위원 김준성 "핸드볼 선수들 독하죠"

 

대한항공 스포츠단 김준성(65) 체력담당위원의 별명은 ‘저승사자’다. 1983년부터 2004년까지 태릉선수촌에서 체력지도위원으로 있으면서 선수들을 혹독하게 ‘굴렸기’ 때문이다. 김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부터 입에 올렸다. “영화 개봉하자마자 봤어요. 실제 훈련은 훨씬 더 힘든데, 영화에선 실상의 10분의 1도 안 보여줬더군요.”

그는 매일 대표선수들의 새벽 운동장 돌기부터 웨이트 트레이닝, 산악 훈련 등을 직접 지도했다. 주말마다 있던 ‘불암산 달리기’를 잊을 수 없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산악 훈련에서 돋보입니다. 권투 세계 챔피언까지 했던 문성길 선수가 참 잘 뛰었어요. 여자 핸드볼 오성옥 선수는 고등학생 때부터 돋보였고요.”

선수 대부분은 산 정상까지 4.5㎞ 거리를 20분대에 주파한다. 가장 느린 것이 여자 양궁 선수들. 40분 이상 걸리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포기한 적은 없다. 선수들은 한 번 출발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코스를 완주해야 한다. “선수들의 기록이 마음에 안 들면 운동장을 10바퀴 더 뛰게 합니다. 힘이 들어 우는 선수들도 있지요.”

김 위원은 ‘지옥 훈련’으로 악명이 높았다. 올림픽 3개월 전부터 시작하는 ‘수퍼 서킷(Super Circuit)’ 훈련이 그것이다. 선수들은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녹초가 될 때까지 운동 기구 100여 가지를 들기 때문에 실신하는 선수까지 생긴다. “처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선수들이 몇 달 지나면 휘파람을 불면서 운동을 끝내요.”

지옥 훈련에도 예외는 있다. 순발력이 중요한 역도·육상(단거리) 선수들은 뺀다. 반면 유도, 핸드볼 선수들은 아주 열심이다. “아테네 올림픽 전이었어요. 30대 여자 핸드볼 선수들이 눈에 띄게 훈련을 하더군요. 성적도 좋았죠. 다른 선수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그였지만 선수들의 연애는 모른 체했다. 90년대 중반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 임오경 선수가 지금 남편인 배드민턴의 박성우 선수와 연애할 때였다. “딱 보니 둘 눈빛이 심상치 않아요. 선수들이 이동할 때 일부러 둘을 끌고 같은 차에 태우기도 했지요. 입은 꾹 닫았고요.” 힘든 훈련 기간에 유난히 서로를 챙기는 남녀 선수들이 눈에 들어온단다. 나중에 보면 이들이 영락없이 청첩장을 들고 찾아온다며 김 위원은 웃었다.

그는 태릉에서의 20년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힘들게 훈련시킨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오면 더 이상 기쁠 수가 없죠. 태릉에서 머리가 하얗게 세었지만 누구보다 보람을 느낍니다.”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저승사자’는 없었다.

홍주연 기자

[week&]

▶'아!…배고파! 밥 줘'. 승리에 굶주린 젊은 사자들

▶ '똑똑한 20대들' 일찌감치 노후준비

▶ "어떻게 '사내'끼리 연애 하죠?" 센스만점 댓글

▶ "당신도 '로거'입니까" 도대체 무슨 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