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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手 조영남 토크쇼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 “당신은 개화기 김옥균 같아. 얼굴 삐죽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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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畵手 조영남과 정치인 안희정,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했다. 열여섯 살 때 함석헌 선생의 <씨의 소리>를 읽고 학교를 그만두고 운동권에 뛰어들었다는 안희정. 이에 조영남은 안희정의 총선 유세 지원까지 약속했다.


‘왕의 남자’ 안희정. 정치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그에게는 공식 직함이 없다. 그냥 ‘안희정’이라고 부르기 어색해 굳이 무엇인가를 붙인다면 지난해 4월 친노 인사들이 모여 참여정부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올바른 이해를 돕고, 부당한 왜곡을 막겠다며 만든 참여정부평가포럼의 ‘집행위원장’ 정도가 전부다.

그는 딱 5년 전 이맘때 지금의 이명박 당선자의 브레인 곽승준 교수이자 유우익 교수였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과 안희정의 관계는 이명박 당선자와 곽승준 교수 혹은 유우익 교수의 관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두고 ‘동업자’라고 칭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26세에 만난 정치인 노무현이 대통령 노무현이 될 때까지 서른 살 때부터 무려 8년간 돈줄을 관리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꼭 두 달 뒤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실형을 살고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쭉 백수였다.

그런 그가 드디어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나섰다. 18대 총선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지난 1월13일 저녁 참여정부 수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역설적으로 참여정부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안희정을 조영남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다.

논산에서 올라와 늦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하던 안희정이 오히려 먼저 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사진과 함께 ‘18대 국회의원선거 예비후보’라는 글씨가 박힌 명함을 한참 쳐다보던 조영남이 입을 열었다.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서인지 조영남은 첫 만남임에도 고향 후배를 대하는 듯한 말투로 시작했다. 어느새 불혹을 훌쩍 넘긴 안희정도 조영남 앞에서는 순박한 동네 청년이 됐다.

중3 때 만난 함석헌 선생의 <씨의 소리>

조영남 논산 제품이네? 안희정이. (논산은) 우리 동네인데.

안희정 (반색하며) 그러세요?

조영남 응. 내가 예산 아녀. 그런데 왜 매스컴에는 사납게 나오지? 논산사람 같지 않아.

안희정 …(머쓱한 웃음)

조영남 누구 잘못인 거야, 그게?

안희정 제가 처음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린 것이 2003~04년인데, 그게 다 잡혀가는 사진이잖아요? 검찰에 소환당하거나 국회 청문회에 서거나…. 제가 그때 헌법재판소, 국회청문회 세 번, 검찰 소환 세 번 해서 한 일고여덟 번 포토라인에 섰거든요. 사람이 즐겁고 칭찬받는 자리에 서야 얼굴이 부드러워지는데….

조영남 세상에 얼굴이 알려진 것이 그때였나?

안희정 2003년 4월, 서부지청에 소환되면서 포토라인에 선 것이 제일 처음이었죠. 대선자금수사 전 단계로요. 예전에 물장사(장수천) 했던 것이 문제가 됐죠.

조영남 그것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이었지? 이미 자네가 ‘왕의 남자’가 되고 난 다음에….

안희정 제가 기업으로부터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기사가 처음 난 것은 대선 직전인 2002년 12월14일이었어요. 그래서 노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도 마음이 가볍지 못했어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이었던 것이죠. 그냥 덮이지는 않을 테고, 야당과 언론이 끊임없이 공격할 텐데…. 그러다 취임 두 달 만인 2003년 4월 소환됐죠. 그리고 그때 사진과 동영상이 5년간 떠돌아다닌 것이고요.

조영남 그럴 때는 웃으면 안 되지. 정신 없는 놈이라는 소리 듣지.

안희정 권력 잡으니까 잘못하고도 웃고 다닌다고 할 테니 웃을 수도 없죠. 제 마음도 웃을 수가 없었고요. 저도 사람인데 떨리고 긴장되고 그랬죠.

조영남 당신 멀쩡한 모습의 사람이라는 것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상을 완전히 깨는 일이거든. 나는 지난 5년간 당신이 안 보이기에, 미안한 말이지만 어디 문제가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 지난 5년 동안 당신 참모습을 보일 기회가 많지 않았나?

안희정 연극이나 무대는 장이 바뀌어야 배역도 바뀌잖아요? 노무현 시대라고 하는 5년짜리 장이 계속되는 이상 그 속의 제 배역은 바뀔 수 없었죠. 제가 조금만 움직이면 측근정치가 발호한다느니 386 아마추어 애송이들이 까분다느니 하는 비판이 나오니까. 딱 이 프레임에 갇혀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조영남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인가?

안희정 개인적 억울함 때문에 다시 출발하겠다는 마음은 없어요. 어쨌거나 이 바닥이 제가 열여섯 살이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잘린 이후 지금까지 종사했던 일이니까요.

조영남 고등학교를 잘렸어?

안희정 1980년 5·18 당시 대전에서 대학생 형들과 ‘이 사건이 뭐냐, 말이 되는 사건이냐’는 내용의 서신 왕래하고 하다 잡혀갔죠.

조영남 허허-. 나는 열여섯 살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주위에서 노래를 잘 부른다니 콩쿠르에나 한 번 나가볼까 이 고민을 했는데, 당신은 같은 열여섯 살에 나랏일을 걱정했다는 말이야? 무엇이 당신을 흥분시켰던 것 같아?

안희정 (잠시 생각하다 진지한 목소리로) 저희는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조국의 아들로 키워진 세대입니다. 애국심을 늘 강조받았던….

조영남 조국의 아들도 스무 살은 돼야지, 열여섯 살이 뭘 알아서…. 도대체 무엇이 열여섯 살의 당신에게 그런 생각을 들게 했느냐는 것이지?

“부모님은 시골에서 철물점 하셨어요”

안희정 초등학교·중학교 내내 충효사상을 배우다 보니 나라에 충성하는 일이 뭘까를 고민하게 됐던 것 같아요.

조영남 그런 교육은 우리도 받았어.(웃음) 그런데 우리는 보통 그러려니 하고 한 귀로 흘려 보내지.

안희정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그렇죠. 그런데 저는 안 그랬어요. 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중학교 3학년 때 함석헌 선생님의 <씨의 소리>를 읽고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 박정희 정권에 충성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죠.

조영남 함석헌 선생의 <씨의 소리>를 중3 때 읽었다고? 어디서 구해서? 논산까지 그게 갔을 리 없는데. 그 시골까지…. 나도 시골에서 중3을 다녀봤는데. 야, 그건 대단하다.

안희정 중학교 때 야당 성향의 선생님이 학교에 몇 분 계셨어요. 그런 선생님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죠. 또 두 살 터울 형이 있었고, 당시 누님은 서울교대에 다니시면서 야학을 했는데, 그 영향도 있었죠.
조영남 내가 왜 납득이 가느냐 하면, 논산·예산·공주 이 동네가 흉측한 동네여. 박헌영부터 예산 덕산의 윤봉길 등 흉측한 사람이 많아.

안희정 그 동네가 그 유명한 황산벌이죠. 계백의 전투에서부터 동학운동까지요. 아마 그 들판에서 싸우다 죽은 원혼만도 헤아릴 수 없을 겁니다. 아마도 그 원혼 때문에 제가…. (웃음)

조영남 그럼, 그런 것이, 그게 역할을 하지. 학교를 그만뒀을 정도라면, 고1 때 검거됐던 것인가?

안희정 하루는 저녁에 자취방에 가보니 주인 아주머니가 사색이 돼서 형사들이 와서 책을 다 가져갔다는 거예요. 어차피 그때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학교를 그만두려고 사회과학서적 외에 교과서는 다 팔고 없앴을 때였거든요. 정규교육을 안 받겠다고 결심했죠. 주인 아주머니가 도망가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대전역까지 갔는데, 도망갈 데도 없고 내가 왜 도망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망막했어요.

그때 제가 무슨 조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다음날 그냥 학교에 갔더니, 학교에 지프가 와 있더라고요. 담임선생님 인솔 하에 잡혀갔죠. 그때 잡혀간 곳이 대전 안기부 지부였는데, 하도 어린애니까 그 사람도 기막혀 하더라고요. 진술서 받고, 왜 충북대 복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누구 영향인지 묻고 몽둥이 찜질 좀 당하다 이틀 만에 나왔어요. 그러고는 학교에서 퇴교당했죠.

조영남 고려대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야?

안희정 그 뒤에 이리저리 많이 다녔어요. 노동판에도 나가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도 거들고…. 그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대방역에 있는 성남고등학교에도 잠깐 다녔는데, 부모님을 설득해서 3개월 만에 자퇴했어요. 그리고 누님이 나가던 제일교회 야학에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며 지냈는데,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서 안 되겠어서 대학을 갔죠.

조영남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었지?

안희정 시골에서 철물점 하셨어요.

조영남 그러면 대학은 제대로 다닌 거야?

안희정 대학교는 1987년과 88년 두 번 구속되고 제적당했죠(고려대 철학과 83학번인 안희정은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며 입학 12년 만인 1995년 2월 졸업했다).

조영남 그 두 번 다 역시 정치 문제인가?

안희정 학생운동 때문이죠. 1987년도에는 고려대 지하서클의 조직부장과 중앙위원이었는데, 그 건으로 수배돼 1년 만에 잡혀갔죠.

조영남 사안이 뭐였어?

안희정 좌파적 사회주의 학생운동을 배후 조직·조종한 혐의죠.

조영남 지금은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때 스스로 좌파적이었던 것 같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몰아간 것 같아?

안희정 사회주의적 평등의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죠.

조영남 좀 쉽게 말해봐.

안희정 1980년대 학생운동은 사회주의적 평등을 지향했죠.

조영남 우리 같은 문외한이 볼 때 자본주의에 대놓고 각을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나?

안희정 1980년대는 사회주의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민중을 수탈하는 체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 보기에 자네도 빨갱이였네?”

조영남 그러면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빨갱이였네?

안희정 이념상으로는 그렇지만…. 당시에는 빨갱이라는 말은 저쪽(독재정권)의 용어이고, 우리 스스로는 독재정권에 반대하기 위해 싸웠다고 말하죠. 내가 행한 행위의 직접적 동인은 쿠데타 정권에 대한 투쟁이고, 그것이 성공한 다음에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로 내 행위를 단정하려는 것이 맞지 않다, 그렇게 대응했어요. 학생운동 사이에서도 평등한 사회적 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혹은 평등이라는 이념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어요.

당시 신일철 철학과 교수가 저를 비롯해 학생운동하는 친구들한테 “19~20세기에 사회주의 좌파 이념 운동의 끝자락을 너희가 탔다. 빨리 깨어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하지만 당시에는 이상과 꿈을 잃어버린 현실화한 교수님의 충고로밖에는 이해하지 못했죠. “아니, 저 분이 1950~60년대 리슨 양키를 번역한 신일철 교수 맞아” 싶었죠. 이제 와서 생각하니 저희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를 힘있는 사람들이 잡아먹던 그 시대의 저항논리의 끝자락을 느꼈던 것이었고, 18~19세기로 치면 계급에 대한 투쟁의 끝자락을 우리가 봤던 것 같아요.

▶대화 중인 畵手 조영남과 안희정.(오른쪽)

하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그것이 이념문제가 아니라 현실문제였죠. 현실에서는 노동자가 노조도 구성하지 못하고, 노동3권도 보장받지 못했으니까요. 반대로 휴전선을 지키라고 보낸 군대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작전권을 가진 미국은 그 상황을 용인하고…. 이렇다 보니 미국이 실제로 제국주의처럼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 것이죠. 우리가 일본한테 지배당해봤기 때문에 패권적 제국주의적 질서를 가지고 국제관계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공격했던 것이죠.

조영남도 달변이지만 안희정도 달변이다. 교묘한 말솜씨는 아니지만 논리적이고 열정이 있다. 언뜻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조영남의 직설적 질문에 대해서도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응수한다. 운동권 인사 특유의 날도 서 있지 않다. 안희정이 이렇게 순박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다.

조영남 항간에서는 당신을 개화기의 김옥균과 비교한다 이 말이야.(웃음) 당신이 김옥균과 관상은 비슷해. 김옥균도 (얼굴이)삐죽하거든.

“당신 관상이 김옥균과 비슷해”

안희정 김옥균 선생님 묘가 아산 영인면에 있어요. 제가 첫 번째 학교를 제적당했을 때, 역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시던 선생님 한 분을 위로할 겸 찾아갔는데 마침 그 선생님이 뒷산에 김옥균 묘가 있다며 같이 가보자고 해서 간 적이 있죠. 그때는 그냥 심드렁하게 갔어요. 어린 나이에도 김옥균은 별로 안 당겼거든요.

우리 국민은 대부분 초·중·고등학교 역사책을 통해 역사의식을 형성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당시 김옥균이 옳았느냐 민비가 옳았느냐, 아니면 대원군이 옳았느냐 동학농민이 옳았느냐에 대해 답을 낼 수가 없어요. 결과적으로 일본한테 다 먹혀버린 거니까. 저 같은 운동권 부류는 동학에 힘을 실었죠. 그런데 최근 10년 전부터는 이것이 그렇게 힘을 싣는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를 두고 시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죠.

조영남 비교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안희정 젊은 개혁자라는 이미지 때문인 것 같아요. 한국사회에서 개혁이 성공한 예가 정도전의 조선 건국 이래 조광조·김옥균 정도죠. 그런데 젊은 개혁가들의 시도에 대해 늘 의기(意氣)는 좋았으나 미숙했다는 식의 결론이 따라붙죠. 그것이 우리 역사의 교훈이에요.

조영남 개혁에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통감한 것이 언제쯤이야? 그냥 그 이야기를 교과서 적으로 알고 있는 거야, 아니면 체감된 거야?

안희정 아무래도 대통령의 측근이라고 불리고 난 이후겠죠. 아무런 직책은 없었지만 이 기간 더 깊이 고민하게 된 결과죠. 지난 5년간 고민의 결과랄까?

조영남 지난 5년이 그런 의미에서는 어마어마한 학습의 기간일 수 있겠네?

안희정 감옥에 있을 때 토머스 머튼 목사의 기도문 가운데 “주님, 우리가 주님께 이르는 길은 질병과 가난뿐입니다”라는 기도문을 읽었어요. 참 공감이 됐죠. 지난 5년이 제게는 공부와 생각을 여러 가지로 정리한 시간이어서 고맙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조영남 종교가 있어요?

안희정 없습니다. 특별히 사찰이나 교회를 다니지는 않아요.

조영남 왜 없는 것 같아요?

안희정 저는 모든 사람 마음 속에는 다 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왜 통합시켜 하나로 만들려는지 모르겠어요. 넓게 보면 주님이든 예수님이든 결국 자기 마음 속의 하나님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제 마음 속의 믿음으로서의 종교는 있죠. 기본적으로 이런 근본적 가르침으로서의 종교는 모두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것 없이는 사람이 살기 힘들죠.

조영남 그런 생각을 언제쯤 하게 됐어?

안희정 역시 감옥에 있을 때요.(웃음) 제가 감옥에 세 번 가서 3년 가까이 있었으니까요.

조영남 예전에 이병철 어른이 이런 말을 했어. 우연히 하신 말씀이겠지만 남자가 크게 되려면 세 가지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혼이랑 파산, 감옥에 갔다 오는 것이래. 나는 일리가 있다고 보거든. 나는 이혼이랑 파산, 두 가지를 해봤어. 감옥만 갔다 오면 돼. 당신은 이혼해봤나?

안희정 못 해봤습니다.(웃음)

조영남 아직 크게 되기는 틀렸어. 파산은 해봤지?

안희정 네. 우리 집사람이 오늘 조영남 선생님 만난다니까 너무 좋겠다 그랬는데…. 이 얘기는 전하지 말아야겠네요.(웃음)

조영남 그래서 나는 감옥에 대한 동경이 있어. 갔다 와야 크게 될 텐데 하는…. 그래서 얼마 전에 우연히 서울구치소를 갔을 때 소장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소장이 아주 걸작이야. “그럼 제가 한번 모셔드리죠. 따라오십쇼” 하면서 독방으로 데려가더라고. 소장하고 둘이 들어갔는데 너무 좋은 거야. 구석에 화장실도 있고, 두 칸짜리 책장도 있고. 와~ 너무 아늑해.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소장이 이상한가 봐. 혼자 있어보라고 나가는 거야. 그런데 혼자 남으니까 더 좋아. 야~ 여기 있으면 공부도 잘될 것 같고, 뭐 하나 작품이 나올 것 같더라고.(웃음) 어쨌거나, 이번에 이명박 씨가 정동영 씨를 압도적으로 누르는 결과가 나올 때 어땠나요? 그런 결과를 예측했나요?

화제가 진지한 정치로 돌아가자 조영남의 말투와 태도가 사뭇 진지해졌다. 더 이상 동네 청년을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청와대 자리 달라는 말 한 번도 안 했다”

안희정 모든 여론조사가 이명박 씨의 30%대 지지율을 예상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죠. 현실에서 그런 일이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요.

조영남 사람이 노무현 정권의 실패, 또는 패배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안희정 여야의 정권교체는 늘 있는 일입니다. 대선에서 졌으니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해요. 만약 그렇다면 민주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국민이 점심에는 중식을 먹고 저녁에는 한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인데, 저녁에 한식집 갔다고 온 시내의 중국집이 전부 간판을 내릴 수는 없잖아요? 이기는 놈이 장땡인 한국의 정치문화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극복해야 할 과제죠. 저는 노무현 정권의 패배다, 실패다 하는 표현 자체가 우리 시대의 극복 과제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영남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권력이라는 것이 전폭적으로 가시적이어야 하잖아? 나도 가시적인 권력의 자리에 앉아봐야겠다, 그런 명함을 좀 들고 다니고 싶다…. 이런 생각 안 했어요? 주위 사람들이든 대통령한테든 그런 생각을 말해 본 적 없나?

안희정 네?

조영남 쉽게 말해 지난 5년 동안 직함이 없었잖아? 물론 금전문제로 감옥에 갔다 오고 하면서 안희정이 누구 못지 않은 ‘왕의 남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명함에 ‘왕의 남자 안희정’ 하고 찍어 다닐 수는 없었잖아?

안희정 (웃음)

조영남 최소한 왕의 남자라면 정책보좌관이니 청와대비서실 누구 이래야 하는데, 이런 자리를 달라고 말해 본 적이 없느냐는 것이지.

안희정 한 번도 없어요. 저는 2003년 감옥에 갈 때 이미 노무현 시대에서 내 배역은 애석하지만 열리자마자 바로 총 맞아 땅에 묻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 소임은 안타깝지만 여기서 끝이구나, 이렇게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에 별로 그런 것은 없었어요. 제 마음을 그렇게 정리하지 않고서는 감옥에서 단 한 시간도 있을 수가 없어요. 저도 사람인지라 중간중간 지금쯤 네가 나서야 한다고 주위에서 충고하면 흔들리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제가 나설 자리는 없었죠.

조영남 노 대통령이 당선되고 당신이 감옥에 갈 때까지는 그래도 반 년 정도 기간이 있었는데….

안희정 대선 직전인 2002년 12월14일 <조선일보>가 안희정이 나라종금 돈을 받았다고 쓰던 날 제 등에는 주홍글씨가 찍힌 것이죠. 2003년 1월 ‘청와대에 안 들어가겠다. 독립 정치인으로 살겠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당시 제 마음은 본대를 떠나 추격대에 잡아 먹히기 위해 홀로 들판에 앉아 있는 심정이었죠. 저는 처음부터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것을 잘 끝낼 수 있을까 이런 마음밖에 없었어요. 저 아니면 그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웃음) 또 제가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고요.

조영남 지금 이렇게 풀린 것이 안희정에게 최선의 길이었던 같아요? 아니면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차선책이 있나? 가령 나를 어떤 포스트에 앉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갈등은 없었어요?

안희정 그 대목에 대해서는 제가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에 지난 5년 동안 한 번도 자리에 대한 언급을 안 했다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린 것이죠. 시집간 딸이 ‘올케언니가 우리 엄마를 잘 못 모실 거야’ 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다 문제가 있어 보여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 모실 것이라고 믿으면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이 생깁니다.

서른 살 때부터 노무현 돈 관리

참여정부나 청와대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들려 저 나름으로 사람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부 내가 있어도 별 수 없었을 일들이었어요. 젊어서는 내가 하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내가 해도 별 수 없겠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후반전에 겨우 몇 분을 남겨두고도 선수 한 명만 바꿔도 팀워크가 바뀌기는 해요. 하지만 그렇게 뛰기에는 제가 상처 입은, 다리 부러진 새라서 뛸 수 없었죠.

조영남 노무현 대통령의 돈 관리를 하다 감옥에 간 것인데, 언제부터 노무현의 총무 역할을 했지? 그것이 총무 역할인가?

안희정 저는 주로 정무팀장이라는 직함을 썼어요. 감옥에 갔던 것은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고요.

조영남 그러니까 1,000만 원이든 1억 원이든, 왜 불법정치자금을 안희정한테 줬느냐 하는 것이지.

안희정 배구로 치면 누군가는 토스를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세터의 역할이죠. 제가 그 역할을 했던 것이고요.

조영남 그럼 언제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세터 역할을 했다는 겁니까?

안희정 노무현 대통령이 1994년 지방자치연구소를 만들 때부터죠. 대통령이 되시기 8년 전부터요.

조영남 야~ 장기간이구나~.

안희정 1993년 말부터 계산하면 9년이고요.

조영남 그럼 시작할 때부터 세터 노릇을 했나? 당신의 주 포지션이 세터가 됐을 때가 몇 살이었죠?

안희정 서른이요.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스물여덟 살 때였어요.

조영남 서른 살? (노무현 대통령) 주위에 그렇게 사람이 없었나?

안희정 (웃음). 저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조영남 다 지나간 이야기이니 털어놓고 이야기하자고. 인물이 없었던 것이지? 그러니까 서른 살짜리한테 그런 역할을 맡기지. 그래, 스물여덟 살 때 무엇을 하다 노무현이라는 선배를 만나게 됩니까?
안희정 노무현 대통령께서 1988년에 청문회 스타로 떴을 때 저는 감옥에 있었어요. 1988년 12월 특사로 나왔을 때 운동하며 알았던 친구 이광재의 소개로 노무현 대통령을 뵙게 됐죠. 그때 광재와는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학생운동 때부터 이름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죠.

석방되자마자 1989년 1월 초 무조건 장가간다는 생각으로 1,000만 원을 대출받으려고 했는데, 직장이 있어야 대출된다는 거예요. 그때 김영철 의원이 김덕룡 의원실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라고 해서 김덕룡 의원실에서 비서관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3당합당이 일어나고, 이철·노무현 의원 등이 꼬마 민주당을 만들어 나오면서 저도 꼬마 민주당에서 일하게 됐죠.

조영남 노무현 대통령하고는 어떻게 함께 일하게 된 것입니까?

안희정 전반적으로 13대 국회에 운동권 출신 보좌관이 많았는데 젊은 보좌관들 사이에 노무현 의원은 모두 모시고 싶어하는 의원이었어요. 당시 노무현 의원은 전통적 의미의 권위주의 문화가 없었고, 보좌관들과 수평적 관계에서 일을 처리하고 논의했거든요. 그 분 방에서 일하면 ‘가방모찌’ 비서가 아니라 정당한 입법부 스태프로 존중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들 함께 일하고 싶어했죠.

기사 전문은 월간중앙 2월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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