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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80년의 봄 …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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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굉음이 가슴을 내려치는 것 같았다. 1980년 봄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던 ‘창밖의 여자’는 4년 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는 완전 종이 달랐다. 한번 들어도 뇌리에 남는 탁이(卓異)한 음색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미 맛보았지만 그때만 해도 조용필의 목소리는 얇았다. 아마 본인도 불만이었을 것이다.

평생 사슬이 될 뻔했던 대마초사건에 따른 활동정지 기간에 그는 판소리 창법을 배워 우리 고유의 소리를 체득하는 고난의 과정을 거친다. 이를 통해 얻은 깊고도 거대한 울림으로 그의 노래는 갑자기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로 바뀌어 나타났다. ‘창밖의 여자’의 마지막 대목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에서 절절하게, 그리고 후려갈기며 포효하는 음은 사람들에게 가슴이 뻥 뚫리는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정’ ‘돌아오지 않는 강’ ‘너무 짧아요’에 취해 있었지만 수년간 그의 신곡을 듣지 못해 애태우던 팬들은 기다린 보람이 있다며 환호했다. ‘창밖의 여자’는 ‘포스트 대마초’를 조용필의 진정한 전성기로, 80년대를 누구도 그의 성곽을 넘지 못하는 독주 독점 독재시대로 견인했다. 라디오연속극 주제가로 스스로 곡을 쓴 ‘창밖의 여자’가 없었다면 ‘오빠부대’도, ‘절대 가왕’ ‘국민가수’란 타이틀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곡이 전파와 길거리 스피커를 수놓던 때가 ‘1980년 봄’이라는 시점을 환기하면 한층 가슴 시리다.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3김이 등장하고 시위 대학생은 거리로 몰려나오고, 이어 5·17과 5·18 광주. 소요와 격동의 어지러운 ‘정치의 계절’에 ‘창밖의 여자’를 비롯해 ‘단발머리’ ‘한오백년’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대전블루스’ ‘슬픈 미소’ 등 조용필의 노래가 줄줄이 애청되는 괴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연예주간지들은 “혼돈의 정국에 연쇄적으로 히트곡을 터뜨린 아이러니한 선풍의 앨범”이라고 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도 데모를 마치고 집에 가선 조용필의 노래를 듣곤 했다. 가족들도 불안한 안개정국과 3김에 대한 토론(?) 후에는 창밖의 여자가 조용필의 실제 연인이고 그 여자는 단발머리였을 거라는 등 확인되지 않은 조용필 관련 소문과 억측으로 얘기꽃을 피웠다. 전국이 학생시위와 동시에 조용필 노래로 휘말렸던 것이다.

하루는 방에 누워 앨범을 듣고 있는데, 평소 자식의 음악청취를 마땅치 않게 여기던 아버지가 들어오시더니 조용필 노래를 테이프로 녹음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아마 유리가게에서 일하며 듣고 싶으셨던 것 같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녹음할 곡을 고르며 유쾌하게 음악을 청취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때 진정한 스타가수는 반드시 어른과 소통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선 말씀하셨다. “조용필 노래는 한이 있어. 요즘 젊은 가수 중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조용필이 유일해!”

나중 조용필을 인터뷰했을 때 그도 똑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국민정서의 핵심은 한이었죠. 80년대로 들어섰지만 대중의 열망과는 달리 군사정권이 계속됐고 사람들 가슴에 서린 한이 내 노래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지요.”

1집 앨범에 수록된 다른 노래 ‘대전블루스’도 잊을 수 없다.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점을 강타한 이 노래를 듣고 목포와 광주사람들은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하는 절규의 클라이맥스 대목에서 절절히 한과 분노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또 어떤 유혹이 그들을 ‘붙잡아도 뿌리치고’ 민주투쟁의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은 아니었는지. ‘창밖의 여자’의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용필의 노래는 대중가요 속성인 소비와 망각을 피하고 역사적 시제를 갖는 특전을 누린다. 중량감이 여기서 나온다고 본다. ‘창밖의 여자’와 80년 봄, 그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 역시 대중가요의 힘은 시대를 반영하는 데 있다. 누가 대중가요를 3분짜리 유행가라고 했던가.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

▶22일 게재된 시리즈 4회 ‘고추잠자리’의 작사가는 김순곤씨로 바로잡습니다.

◆베스트 10 선정위원
 
임진모·송기철·박은석(대중음악 평론가), 이영미(한국대중가요사 저자), 김종휘(문
화평론가), 신승훈·이승철(가수), 주철환(OBS 경인TV 사장), 하성란(소설가), 이재무(시
인) 총 10명. 그들 각자에게 조용필 히트곡 15곡 내외를 추천받아 그중 10곡을 엄선했다.

조용필, 그때 내 마음은 …

‘창밖의 여자’는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다. 드라마 작가 배명숙씨가 전화로 불러준 가사를 듣고, 1979년 말 곡을 붙였다. 오랜만에 방송에 나가는 것인 만큼 신중하게 만들었다. 곡 쓰는 데 10분도 채 안 걸렸다. 빨리 만드는 노래가 더욱 대중성 있고, 좋은 경우가 있다. ‘단발머리’도 그랬다. 대마초 사건이 있던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때여서인지 뭔가에 심취된 듯 곡을 썼다. 노래가 어두웠던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80년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노래다. 조용필 음악의 시작이라고 봐도 된다. 주제가가 히트하는 바람에 한 달 예정이던 드라마가 두 달로 늘어났다. 노래는 라디오 방송 차트에서 19주 연속 1위를 했다. 노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데, 나는 가사와 곡에만 치중했다. 가사와 노래의 분위기가 당시 시대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적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 같다. ‘창밖의 여자’는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다. 드라마 작가 배명숙씨가 전화로 불러준 가사를 듣고, 1979년 말 곡을 붙였다. 오랜만에 방송에 나가는 것인 만큼 신중하게 만들었다. 곡 쓰는 데 10분도 채 안 걸렸다. 빨리 만드는 노래가 더욱 대중성 있고, 좋은 경우가 있다. ‘단발머리’도 그랬다. 대마초 사건이 있던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때여서인지 뭔가에 심취된 듯 곡을 썼다. 노래가 어두웠던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80년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노래다. 조용필 음악의 시작이라고 봐도 된다. 주제가가 히트하는 바람에 한 달 예정이던 드라마가 두 달로 늘어났다. 노래는 라디오 방송 차트에서 19주 연속 1위를 했다. 노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데, 나는 가사와 곡에만 치중했다. 가사와 노래의 분위기가 당시 시대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적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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