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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216.중간평가-황태자의 無用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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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간평가라는 6共정국의 핵을 수면하로 사라지게한 것은 공식적으로 89년 3월20일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유보선언이다.그러나 공식선언은 비공식적인 물밑정치의 결과에 불과하다.물론 비공식적인 물밑정치도 그 심도(深度)에 따라 정치적 비중은 천차만별이다.물밑정치의 가장 깊은 곳에는 친인척이 숨어 있었다.
20일 중간평가 유보선언을 가능케한 물밑정치는 바로 하루전인19일 집권 민정당 김윤환(金潤煥)원내총무와 제1야당 평민당 김원기(金元基)원내총무간의 밀실대화였다.김윤환총무는 대통령의 친구이자 6共 창업공신이었고 김원기총무 역시 김 대중(金大中)총재의 남다른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두사람의 만남은 단순한 총무회담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김윤환총무는 이날 오후 김원기총무를 만나기에 앞서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당대의 실세 박철언(朴哲彦)정책보좌관과 홍성철(洪性澈)비서실장,그리고 청와대내 중간평가 담당수석인 최창윤(崔昌潤)정무수석등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金총무는 이날 盧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에서「중간평가유보」방침을 최종 통보받았다.그는 이미 확정된 원칙의 틀내에서 평민당과의 마무리담판을 하기 위해김원기총무를 찾았던 것이다.
이날 저녁 호텔신라에서 만난 양당 총무는 거의 밤을 새워가며중간평가 문제와 함께 5共청산.지자제 실시등 굵직한 이슈들에 대한 협상을 일괄타결했다.모든 이슈는 서로 연관돼 있었기에 한꺼번에 협상테이블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보다 쉽 게 말해 평민당이 「중간평가 유보에 동의해준다」는 큼직한 선물 하나를 내놓고 대신 여권으로부터 5共청산을 위한 정호용(鄭鎬溶)의원의 의원직 사퇴와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의 국회증언및 지자제 실시등묵직한 선물 몇가지를 대가로 가져간 셈이다.
그런데 이날의 밀실대화 역시 더 깊은 밀실대화의 결과에 불과했다. 김윤환총무는『그날 나는 청와대에서 준 초안에 따라 실무적으로 김원기총무와 합의한 것에 불과합니다.청와대 초안은 박철언보좌관의 작품이고요.중간평가 유보나 정호용 처리문제등도 모두그사람 아이디어였어요』라고 기억했다.
사실 金총무는 이날 주요 거래조건에『개인적으로 모두 반대하는입장』이었다고 한다.그는 여권에서 그토록 기피하고자 했던 중간평가 문제에 대해『정면돌파해야 했다』고 주장했다.정면돌파해야 정국의 주도권을 쥘수 있고,또 평민당에 대가로 내주어야할 친구정호용의 희생이나 5共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모셨던 전두환前대통령의 국회증언도 막을수 있었다는 논리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거의 펼치지 못했다.그는 이에대해『박철언보좌관은 자신의 생각을 직접 얘기하기보다 미리 盧대통령에게 얘기한뒤 盧대통령이 이를 다시 지시하게하는 식으로 일을처리하곤 했죠.처음에는 대통령의 뜻인줄 알고 쫓 아가다 나중에뒤돌아보면 朴보좌관의 작품이기 일쑤예요.그러니 반대하기 힘들죠』라고 말했다.
金총무의 기억처럼 한결 더 깊은 물밑대화의 주인공은 박철언보좌관이었다.그러나 박철언前의원은 합의초안이 전적으로 자신의 작품이었다는 부분은 부인했다.그렇지만 중간평가 유보가 자신의 지론이었으며 대통령의 유보결심이 자신의 설득결과임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중간평가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내가 이끌고 있던 팀에서도 검토결과 역시「불가(不可)」로 결론을 냈습니다.그래서 盧대통령을 설득했죠』라고 말했다.그는 盧대통령에게 『중간평가는 이기나 지 나 무조건 손해입니다.투표하면 이기긴 이깁니다.개발도상국에서 국민투표해 집권세력이 진 사례가 없습니다.그러나 이기면 뭐 합니까.선거과정에서 금권선거등 불법.타락양상은 불가피합니다.그런데 이긴다고 국회의 여소야대(與小野大)의석이 여대 야소(與大野小)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투표 끝나고 다수의석인 야당에서 지난 대통령선거에서의 컴퓨터부정 시비처럼 특위라도 구성해 조사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겁니까.정국이 예측불허의 혼란에 빠져들게됩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국민앞에 약속한 공약인만큼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중간평가를 실시해야 한다는 뭇공신들의 주장보다 핵심측근 박철언보좌관의 무익론(無益論)이 훨씬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은 물론이다.더욱결정적으로 盧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목은 朴 보좌관의 정계개편 주장이었다.
朴前의원은『당시는 3黨을 상대로 한 정계개편,즉 보혁(保革)구도 구상을 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88년 총선패배 얼마뒤 정계개편을 주장했을 때만해도 盧대통령은「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라」고 일소했었죠.하지만 그동안 조금씩 대통령을 설득해 당시는 대통령도 정계개편에 상당히 관심을 쏟고 있었죠.원래 盧대통령에게 말할 때는 한꺼번에 말하면 안되고 조금씩 끈기있게 설득해야 합니다.그래서 「궁극적으로 여소야대 정국은 정계개편만으로해결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중간평가를 안해도 어차피 정계개편으로 정치적 수세국면은 돌파할 수 있다」고 설득했죠』라고 기억했다.朴前의원은 또『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인 회의석상에서는 그냥「정치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곤했죠.정계개편 복안을 내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朴보좌관은 중간평가를 유보하기 위해 제1야당의 리더,실질적인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있던 김대중평민당총재도 설득해야했다.金총재를 설득하기로 한 것은 그가 당시 정국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이다.金총재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는 「황금분 할」상태인 정국에 변화의 돌풍이 일기를 원치 않으리라는 것은 정치적상식이다.거꾸로 제2야당이 된 민주당 김영삼(金泳三)총재는 소수세력이 상용하던 선명노선을 부르짖고 있었기에 당연히 「신임을걸고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 었다.
朴보좌관은 김대중총재를 만나 『투표하면 어차피 여당이 이기지않겠습니까.그런 투표를 해서 남는게 뭐가 있겠습니까』라며 중간평가 유보에 협조를 당부했다고 한다.예상대로 金총재는 이해를 같이했다.
***軍部 자극 가능성 朴보좌관이 김대중총재에게 중간평가 유보를 주장하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된 것은 엉뚱하게도 군부의 심상찮은 분위기였다고 한다.88년말부터 89년초에 걸쳐 평민당이 주도한 광주청문회등은 군부의 정치권에 대한 반감을 한창 북돋워 놓은 상황이었다.중간평가를 할 경우 군부를 자극할 사건이돌발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투표가 끝난 다음에도 정국이 혼란에 빠질 경우 군부가 다시 나서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던 상황이었다.광주문제는 이미 6共출범 당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 화위)라는 기구를 통해 한번 걸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폭발위험성이 높은 이슈였다.김대중총재가 이런 문제에 누구보다 신경을 쏟지 않을수 없는 입장임은 자명하다.
어쨌든 그렇게 김대중총재의 이해와 박철언보좌관,보다 정확히 말해 노태우대통령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에 89년 3월10일 청와대에서 노태우.김대중 회담이 열릴수 있었다.
朴보좌관과 같이 중간평가를 반대한 또다른 비공식 권력,즉 친인척은 처남 김복동(金復東)씨였다.金씨는 청와대에서 열리는 친인척끼리의 저녁자리 참석자중 한사람.흔히 「가족회의」라고 불리는 이런 비공식 모임의 참석자는 朴보좌관과 金씨, 그리고 대통령의 손아래 동서인 금진호(琴震鎬)씨였다.친인척은 아니지만 가족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가까웠던 대통령의 친구 이원조(李源祚)前의원도 자주 동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金씨와 琴씨는 6共출범 당시 정치일선에 나서고자 했으나 한창 문제가 되던 5共 친인척 비리의 재발 가능성을 우려한대통령에 의해 13대 국회의원선거 출마를 저지당했던 사람들.이들 두사람은 4년을 쉰 뒤 盧대통령의 퇴임 1년 전인 92년 14대 선거에서 나란히 공천받아 금배지를 달았다.하지만 금배지를 달기전까지는 「자신의 역량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입문하지 못한다」는데 대한 울분과 함께 정치적 야망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상공부장관까지 지낸 엘리트관료 출신인 琴씨나 육사11기로 3星장군 출신인 金씨가 5共 친인척 비리의 주인공인 경호원출신 전경환(全敬煥)씨,교통경찰출신 전기환(全基煥)씨등과 비교돼 정치활동을 못한다는 것부터가 불쾌했음직하다.
같은 친인척이면서도 당당히 국회의원직과 청와대수석비서관직을 겸하고 있던 박철언보좌관으로부터 느끼는 상대적 소외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盧대통령은 6共의 창업공신들이 친인척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박철언이만은 예외로 해달라.다른 사람들(김복동씨와 금진호씨등)은 내가 책임지고 막겠다』며 박철언씨만 감쌌다고 한다.당연히 가족회의는 김복동.금진호씨 두사람이 평소 억눌렸던 현실참여 욕구를 풀어내는 분출구이기도 했다.
***“朴哲彦만은 예외” 6共 청와대 관계자 Z씨는 『금진호씨는 상당히 세련된 편인 반면 金씨는 꽤 저돌적인 편이죠.琴씨는 주로 경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말을 많이 했는데 우회적으로 대통령의 기분을 맞춰가며 건의를 했다면,金씨는 주로 정치와관련된 자기 주장을 상당히 직설적으로 펼치곤 했습니다.두 사람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琴씨는 손아래 동서고,金씨는 손위 처남이라는 혈연관계도 작용했겠죠.그러다보니 나중에는 盧대통령이 金씨를 싫어하고 琴씨만 좋아하게 됐죠』라고 기억했다.
특히 金씨는 정치참여 욕구가 남달라 청와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강행,공천을못받게되자 대통령의 처남이면서 무소속출마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을정도였다.이후 정치일선에 나서지 못한 가운데서 도 金씨는 예비역장성 모임인 송백회(松栢會)를 이끌거나 명사들의 모임성격인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의 동창회장을 맡는등 활동반경을 넓혀왔다.
그는 盧대통령의 중간평가 유보선언직후 외신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중간평가 폐기를 건의했었다』 고 밝혔다.
어쨌든 그렇게 친인척들의 힘,친인척을 통한 김대중총재와의 밀실합의로 중간평가라는 고비는 「유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무효화됐다.한편 이같은 민정당.평민당간의 밀회를 지켜보면서 가장 가슴 아파했던 사람은 제2야당 민주당의 김영삼총재 였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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