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70. 하버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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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6년 겨울 필자가 우산을 쓰고 눈 내리는 하버드대 교정을 걷고 있다. 눈이 오면 동양인만 우산을 썼다.

‘한국에서 이렇게 가르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986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1년을 보냈다. 이화여대에서 10년을 채우고 얻은 안식년을 하버드대에서 보낸 것이다. 음악학 전공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수업을 참관했다. 나는 주로 민족음악학을 연구하는 대학원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가 학생에게 특별히 가르치는 게 없는 듯했다. 학생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연구한 것을 발표했다. 교수는 방향만 잡아줬다. 미국에는 세계 각국 음악가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중국이며 인도, 아프리카 국가 등 그 어느 나라의 음악가도 직접 만나 현장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놀라움은 학부의 음악학 강의계획서였다. 교수의 한 학기 강의계획서가 한 권의 완전한 책처럼 만들어졌다. 두서너 페이지짜리 계획서를 내는 당시 한국의 대학 풍토와는 달랐다. 한 교수가 담당하는 과목이 몇 개 되지 않는 미국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강의계획서를 만들기 위해 교수들은 엄청난 시간을 쏟아 부었다. 학생들이 조사해온 것을 발표하면 교수는 지켜보고 있다가 이것저것 조언을 했다. 심지어 말투와 표정까지 고쳐줬다.

 1년 365일 내내 학문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학교에서 한국인의 피를 발견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T.S.엘리어트의 스승인 영국 대문호 에즈라 파운드(1885~1972)가 중국의 시경(詩經)을 번역한 적이 있다. 이 책에 서문을 써준 중국문학 권위자가 아킬레스 팡이라는 하버드대 교수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중국에 가서 한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누구나 중국 사람인줄 알지만 사실은 한국사람이다. 한국 성이 방(方)씨다. 그 자신도 한국인이라는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중국인 음악학 교수를 통해 그가 한국인의 피를 가졌다는 것을 들었지만 하버드대에서 1년 머무는 동안 교정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만 몇 번 봤을 뿐이다. 팡 교수처럼 핏줄은 한국인이지만 스스로 미국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얼 킴이라는 유명한 작곡 교수였다.

 85년 크리스마스 직후 하버드대로 간 나는 이듬해를 꽉 채우고 돌아왔다. 1년 동안 아내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소설가인 그도 한국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화여대 사학과에 다니던 큰딸이 1년을 휴학하더라도 같이 가고 싶다며 따라 나섰다. 그에게 하버드대는 학문적 동경의 대상이었을 터다. 나는 하버드대에서 ‘서양음악에 미친 동양음악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썼다. 공부에 미친 사람들과 진한 교감을 나눈 귀한 1년이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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