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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관계 4가지 시나리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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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베이징의 6자회담이 이번엔 뭔가 합의를 이끌어낼 조짐이다. 미국이나 북한이 지난번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는 게 회담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한결같은 관측이다. 뉴욕 타임스는 경제적 지원을 앞세워 북한을 달래려는 한국과 중국에 대해 미국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이번 회담의 수석대표로 미국통인 김계관 외무차관과 한성열 유엔 차석대사를 보냈으며 영어통역은 다른 언어의 경우와 달리 두명을 보냈다고 한다. 이번엔 뭔가 미국과 얘기를 나눠보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미국측 기조발언에 이어 북한 측이 예상 밖으로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든지, 25일에 벌어진 북.미간 개별접촉이 1시간 이상 지속됐다는 점도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회담을 주도해 나가는 중국을 소리없이 뒷받침하는 미국의 모습이다. 물론 중국은 미국이 그어놓은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동북아 지역 안정에 핵심적 요소인 북핵문제의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미국이 편안하게 바라보며 심지어 박수까지 보낸다는 것은 흥미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취임 초기 중국은 전략적 동반자가 아니라 '전략적 경쟁자'라고 규정했다. 안정적이고 강력하든, 불안정하고 상대적으로 약하든 중국은 언제나 위험하거나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엔 아시아의 현상유지를 끊임없이 뒤흔들 것이고, 후자의 경우 중국의 지도자들은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외국을 상대로 군사적인 모험을 감행하려 들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언제부터인가 '전략적인 경쟁자'라는 수사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중국이 아시아 각국과의 정치.경제.군사적 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국제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미국의 식자들이 늘고 있다. 중국의 몸짓이 두드러진다고 그만큼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미.중 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중국에 대한 미국 보수파들의 잠재적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도 중국 위협론은 미국 사회에 뿌리깊게 퍼져 있고, 설득력있게 전파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결국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미국 내의 논의는 아직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6자회담은 미.중 관계의 현실이 어디론가 거침없이 흘러간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몇년 전 미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앞으로 10년간의 미.중 관계를 네 가지 방향으로 전망했다. 계속해서 티격태격하지만 중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커져간다는 권력전이(權力轉移), 처음엔 서로 불신하지만 나중엔 실질적이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로 발전하게 된다는 유암화명(柳暗花明), 상대에 대한 불신을 간직한 채 서로 국내의 어려운 문제에만 얽매이게 된다는 동상이몽(同床異夢), 어려울 때 도우며 같은 배로 함께 건넌다는 동주공제(同舟共濟)가 그것이다.

물론 대만 문제 등 여러가지 변수가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 6자회담에서 보이는 미.중 관계는 최소한 권력전이나 유암화명의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같은 미.중 관계의 변화 속에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은 어떻게 끼어드는 걸까. 우리는 지금 서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서있는 걸까.

이재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