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명절날 갈리는 ‘여자의 운명’ <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다시, 명절이 코앞이다. 이즈음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운명을 가진 여자가 존재하는 듯하다. ①(서울에서 지방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여자와 ②안 내려가도 되는 여자. 안 내려가도 되는 여자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③(지방이 아닌) 시댁에 가서 전 부치는 여자와 ④해외여행을 가거나 마사지를 받으며 평소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억세게 운 좋은 여자. 여자들끼리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서서히 신분이 갈리는 느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명절을 맞는 여성 계층 분류표’에 따르면 최상층은 ④번, 최하층은 ①번이다. ①번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이동 거리가 멀수록, 이동 후 체류 시간이 길수록 순위는 더 밑으로 내려간다.

동창 모임에 나가면 대개 남편이나 자식이 얼마나 잘나가는지, 아파트 평수는 얼마나 넓혔는지에 따라 불꽃 튀는 자존심 대결이 벌어진다. 그러나 명절 치르는 문제 앞에서는 그런 물질적·외형적 조건은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신기한 일이다. 방송국 PD인 C씨는 희귀 사례인 ④번에 해당한다. 그의 명절 치르기는 명절 전날 시댁 식구들과 식당에서 밥 한 끼 먹는 걸로 끝이다. 시부모가 기독교인이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데다, 신혼 초부터 자유로운 명절 보내기에 대한 온 가족의 합의를 성공리에 이끌어낸 덕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명절 보내기에 있어서는 C씨만큼 ‘시집 잘 간 여자’도 없는 셈이다.

설을 2주쯤 앞둔 지금은 “언제 올 거냐”는 시부모와 “내려가지 않을 합법적인 핑계 없을까”하는 며느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치열해지는 때다. 어르신들도 이제 눈치가 도통해서 “서울 올라가는 표 구해놨다”고 애교 어린 선수를 치거나, “너희 줄 참기름 챙겨놨다”로 유인책을 구사한다. 내키지는 않으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안 갈 수는 없는 수많은 며느리들. ‘갈 때는 고속버스, 올 때는 KTX’라는 그들의 소극적 대응법은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럽다.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 비해 우리들의 명절 보내는 법은 너무 구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2시간 가까이 걸려 가족끼리 얼굴을 확인했을 때의 기쁨,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기쁨을 꼭, 항상 가족 구성원 전체가 골고루 공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근본적이진 못하나 그런대로 해결책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제사음식을 일부 또는 상당량 구입해 가사노동량을 줄이면 굳이 명절 전날 여성들이 하루종일 부엌데기로 징발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멀리 떨어진 식구들의 얼굴을 못 봐 서운하다면 민족의 대이동이 집중되는 명절을 살짝 피해 오갈 수도 있을 것이다. 화목하기 위해 모이는 명절, 모이는 방법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해 궁극적인 화목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