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광대 30년 “우리 가락을 세계의 소리로”

중앙일보

입력 2008.01.22 05:24

업데이트 2008.01.2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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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물놀이 원년 멤버들이 30년 전 첫 공연장에 다시 모였다. 왼쪽부터 남기문·김덕수·이광수·최종실씨. 아래 사진은 1978년 첫 공연 모습. 그땐 남씨 대신 고(故)김용배(맨 오른쪽)씨가 참여했다.
 21일 오전 서울 원서동의 문화공간 ‘공간 사랑’.

 ‘덩덩덕 징징-’ 한국의 타악기 네 개가 조용히 울리기 시작했다. 징·장구·꽹과리·북을 잡은 네 명의 얼굴엔 세월의 더께가 앉아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깊은 주름이 박자에 따라 흔들렸다. 꼭 30년 전인 1978년 같은 곳. 이들은 사물놀이 첫 공연을 열었다. 북 이광수, 장구 김덕수, 징 최종실, 꽹과리 김용배. 100여 명이 들어올 수 있는 이 작은 극장에서 당시 20대의 젊은 광대들은 풍물악기를 신나게 두드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50대 중반을 넘은 이들의 리듬이 점점 빨라졌다. 조용한 비나리는 곧 삼도 농악가락으로 바뀌었다. 최종실(55)은 북이 찢어지도록 힘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광수(56)의 꽹과리는 청년 시절과 똑같이 힘찬 울음을 울었다. 연주를 마친 네 명은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았다. 귀가 멍멍했다.

 사물놀이가 꼭 30주년을 맞았다.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사물을 가지고 신나게 노는 것”이라며 이름을 지어준 것이 시작이었다. 원년 멤버들은 이날 첫 공연장에서 다시 만나 기자간담회를 열고 짤막한 공연을 펼쳤다. 꽹과리를 치던 상쇠 김용배는 86년 세상을 떠났고, 그가 “나의 예술을 이해하는 단 한 명”이라며 아끼던 제자 남기문(50)씨가 그 자리를 채웠다.

 김덕수(56) 씨는 “우리는 숙명적으로 만난 광대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5세에 아버지와 집을 떠나 어른의 어깨에서 노는 ‘새미’ 역으로 남사당패에 들어갔다. 다른 3명도 어린 시절부터 남사당패나 농악계에서 한국의 소리에 인생을 맡겼던 이들이다. 김씨는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알고 태어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일곱 살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장구의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김씨는 풍물악기 중 네 개만을 추려 무대에 올렸다. 그는 “마당에서 놀던 악기들을 실내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큰 충격을 던졌다”고 기억했다. 첫 연주를 마친 네 명은 분장실로 돌아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한다. “전통문화가 푸대접 받던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데서나 놀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서러움이 이 작은 극장에서 다 터져나왔다.

 이광수 씨는 “전통문화는 모두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우리의 것이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는 엄혹한 시절이었다”고 첫 공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들은 풍물 복장을 구할 방법이 없어 하얀 천의 장의사 옷을 얻어 입었다. 연습실은 다른 선배에게 겨우 빌렸다고 한다. 건축가 김수근이 젊은이들의 뜻을 알고 공연 공간을 내어줬다.

 어려움 속에서 시작한 사물놀이는 이제 한국의 대표적 장르로 자리잡았다. 82년 세계타악인대회(미국 댈러스)에서 존재를 알린 사물놀이는 이후 세계 거의 모든 종류의 악기와 함께 무대에 섰다. 김씨는 “우리는 사물놀이가 지구촌의 새로운 에너지가 되는 날을 꿈꿨다”고 말했다. 대영백과사전에 ‘사물노리안(samulnorian:사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보통명사를 올리기도 한 이들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 많다. 김씨는 “앞으로 세계의 모든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이 사물놀이로 한국의 리듬을 두드리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30주년을 기념하는 원년 멤버의 공연은 3월 6~7일 오후8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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