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드레스덴 空襲 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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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해 6월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일(D데이)50주년 기념일이었다.제2차대전 참전 연합국들은 이날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였다.이날 행사에서 독일인들은 국외자(局外者)였다.제2차대전을일으킨 당사자로서 독일인들은 이날을 반성의 날로 삼았다.그러나그들도 할말은 있었다.드레스덴의 비극에 대한 해명을 원했다.독일인들에게 D데이의 D는 바로 드레스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드레스덴은 유서깊은 도시다.12세기 동방 식민정책으로 독일에편입된 드레스덴은 후에 작센州 수도가 됐다.특히 17세기 이후문화.예술이 크게 발달해「엘베강의 피렌체」라는 명성을 얻었다.
바로크양식 건물들이 밀집한 구시가(舊市街)는 독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후 독일군은 계속 밀렸다.많은 피난민들이 드레스덴으로 모여들었다.당시 드레스덴 인구는 전전(戰前)의2배인 1백20만명을 넘어 있었다.피난민들이 몰린 이유는 문화유적들 때문에 연합군이 드레스덴은 폭격하지 않는 다는 소문 때문이었다.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1945년 2월13일 연합군은 드레스덴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시작했다.두달동안 다섯차례에 걸쳐 실시된 이 작전에서 영국군 랭커스터 폭격기 8백5대와 미국군 B-17기 4백50대가 「융단폭격」으로 소이탄(燒夷彈)65만발을 쏟아부었다 .3만채의 건물이 파괴됐으며 13만5천명이 사망했다.성모(聖母)교회를 비롯한 숱한 문화유산들이 잿더미가 됐다.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은 명목상 소련군의 진공(進攻)을 배후에서 지원한다는 것이었으나 군사적 의미보다 독일에 대한 보복이라는 정치적 성격이 더 강했다.독일에 영원히 남을 「교훈」을 주기 위해 독일인들이 아끼는 드레스덴을 택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
올해는 제2차대전 관련「50주년 행사」가 줄을 잇는다.지난달27일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을 비롯해 5월8일 유럽戰 승리50주년, 그리고 종전(終戰)50주년 및 광복 50주년 행사가그것들이다.드레스덴 공습 50주년 행사도 그 중 하나다.드레스덴市는 이번 행사를 평화와 화해의 행사로 차분하게 치른다.
세계는 드레스덴의 비극을 전쟁이 갖는 反문명性을 되새기는 역사의 거울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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