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분단의 비극을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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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미도'를 보았다. 1000만명이 넘게 '실미도'를 보았다고 한다. 그동안 분단의 비극을 그린 영화는 많았다. 그러나 10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한 영화는 처음이다. 곧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 기록을 경신할 전망이다. 그 영화 또한 분단의 비극이 배경이다.

*** 과거 반성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

처음 충격을 준 작품은 '쉬리'였다. 이어서 시각을 달리한 'JSA공동경비구역'이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쉬리'의 설정은 남과 북이 '주적'으로 대결한 상태에서, 'JSA'는 표면상의 대치 상태에서 실질적인 친근감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현실을 조명해 평화통일을 향한 화해협력 시대에 맞춰진 시각을 표현했다. 그런데 '실미도'는 30여년 전 대결 구도의 시대로 돌아가 그때 적국의 잔학성에 맞서서 과연 우리에게 어떤 잔인한 일이 일어났었던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 과거를 반성하게 한다. 대결구도에서 화해협력 시대로 들어선 길목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북파 공작 훈련병 모두가 버스 안에서 자폭하는 마지막 장면은 목이 메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인류 역사의 뒤안길에 비인간적인 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또 인간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이상으로 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줄기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분단의 비극은 상징적으로 '쉬리'와 'JSA'를 거쳐 '실미도'에 와 닿았다. 분단 상황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많은 귀중한 목숨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빚진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결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결코 잊어서도 안 될 비극이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면서 분단의 비극을 넘어서 평화통일 시대로 가야 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을 체험한 세대와 체험하지 않은 전후세대 모두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을 형제의 시각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형이 동생을 살려 제대시키려는 일념에서 훈장을 타기 위해 전장에서 잔혹해지는 변화를 동생으로선 참을 수 없어 한다. 동생의 자아가 강해질수록 형의 전쟁은 더 어렵고 위태로워진다. 위기상황에서 사랑하는 관계는 참으로 힘들고 처절하고 안타깝다.

영화 '태극기…'는 그 무슨 이념의 전쟁도 대의명분의 전쟁도 아닌 인간 비극의 전쟁임을 형제의 비극을 통해 말해준다. 구두를 닦아 동생을 공부시키고 훗날 구두를 만들어 보겠다는 형의 소망, 전쟁이 전날 밤의 꿈, 한판 악몽이었으면 좋겠다는 동생의 참담한 심정은 한 인간의 소박한 행복추구권을 말살하는 전쟁의 성분을 그려주고 있다.

'실미도'와 '태극기…'를 함께 생각해 본다. 둘 다 분단의 비극이 초래한 참상이다. '실미도'는 과거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됐다는 점에서 강한 반성이 요구되는 시점임을 인식시킨다. 다만 영화 속에서 '적기가'가 반복해 불려지는 것은 안보상 문제 의혹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서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태극기…'는 허구이지만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작품으로 말해준다.

요즈음 메시지가 강한 영화들이 관객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은 매우 유효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비극적인 일들을 다시 생각하고 반성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해 가는 데 가장 힘있는 역할을 영화예술이 감당할 수 있는 시대라고 본다. 우리는 영상시대에 살고 있고 영상을 통해 가장 신속하게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통일 기여하는 영화 많이 나오길

"인간성은 이성이 자유로워야 회복될 수 있다"고 필리핀의 국민 영웅 호세 리잘이 말했다. 인간의 생명.자유, 그리고 행복추구권이 빼앗기지 않고 유지되는 사회에 대한 열망을 자유로운 이성으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길도 영화예술 속에 있다고 본다.

한반도는 냉전 시대가 가고 화해협력 시대를 거쳐 평화번영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아직 남북의 대치 상황에서 냉전의 기류가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화해의 기류를 돌려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평화통일이 절실한 만큼 평화번영의 행로에서 정책과 전략을 보좌하는 훌륭한 영화를 더 많이 기대한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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