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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211.3黨통합 求國결단이냐 밀실통합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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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90년 1월22일 오전10시 청와대.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덮인 뜰을 내다보며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민주당총재,김종필(金鍾泌)공화당총재가 마주 앉았다.회담은 9시간이나 계속돼 오후7시가 되어서야盧대통령은 양김(兩金)총재의 손을 잡고 기자회견 장에 나타났다.그리고「구국의 결단」으로 3당을 하나로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회담이 9시간이나 계속된 것은 정치적 제스처였다.사실 이날 회담에서 다소의 이견이 있었던 부분은 이미 합의한 내각제 개헌추진을「언제 발표하느냐」는 지엽말단에 불과했다.盧대통령과 김종필총재는 빨리 발표해 공식화하자는 주장이었고,김영 삼총재는 이를 극구 반대했다.
반대이유는『지금 발표하면 3당 통합이 정권연장 음모라는 인상을 주고,그렇게 되면 될 일도 안된다』는 것이었다.결국 김영삼총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그럼에도 회담이 길어진 것은 그간의밀실협상을 감추기위 한 것이었다.이미 밀실협상에서 모든 것이 합의되었다는 사실을 감추는 한편 이날 회담에서 많은 진통을 겪고 극적인 합의를 했다는 인상을 주기위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날의 전격통합은「구국의 결단」이든「밀실 야합(野合)」이든간에 오늘까지의 정치구도를 틀지운 헌정사의 대사건이었다.
김영삼총재 입장에서 이는 대권장악의 가장 확실한 담보였고,김종필총재 입장에서는 비록 권력서열상 3인자일 망정 변방을 탈출해권력핵심에 재합류한 계기였다.95년1월 현재 상황을 보면 의도했던대로 김영삼총재는 대통령이 되었고 김종필총재는 이날의 3당합당을 붙잡고 최근까지 여당대표로 자리를 지켜온게 아닌가.
그러면 통합을 주도한 盧대통령은 어떤 생각에서 통합을 추진했는가.권력의 정점에 있는 盧대통령의 궁극적 관심사는 초기의「권력기반 확보」와 중기의「영향력 강화」및 후반기의「퇴임후 안전」세가지였다고 볼수 있다.전임자인 전두환(全斗煥)前 대통령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확보하는데 재임 전반부를 허비해야했던 盧대통령은 남은 두가지,즉 남은 기간중 정권의 영향력강화와 퇴임후의 안전을 위해 통합이라는 변칙수를 둔 것이다.당시 盧대통령이 구상한 보다 구체적인 정권의 영향력 강화방안은 국회의석의 절대다수 확보며,퇴임후의 안전장치는 내각제 개헌과 권력분산이었다.
비록 개헌과 권력분산은 안됐지만 盧대통령은 퇴임후 신변에 아무런 이상없이「2세 정치」(아들 載憲씨의 정계진출)를 후원하고있다. 盧대통령이 합당을 언제부터 결심했는지는 확실치않다.어느누구에게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아온게 노심(盧心)의 특징중 한가지다. 그러나 여권 핵심내에서 정계개편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노태우정권출범 불과 두달후인 88년4월26일 총선 바로 다음날부터였다.총선결과 여당은 지역구 의석 2백99석중 과반수에 못미치는 1백25석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패배였다.정권출 범의 흥분이 가시지않은 시점,압도적 승리를 예상하던 분위기였기에 충격은 더했다.
총선 다음날인 27일 아침,밤새 개표결과를 지켜보느라 눈이 충혈된 여권 핵심인사들이 청와대옆 궁정동 안가에 모였다.입법부의 여권책임자인 채문식(蔡汶植)민정당대표,행정부의 책임자인 이현재(李賢宰)국무총리,정보책임자인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청와대 참모의 수장인 홍성철(洪性澈)비서실장,대통령 선거대책본부장과 취임준비위원장을 역임했던 실세 이춘구(李春九)의원,그리고청와대내 총선 지휘사령탑이었던 최병렬(崔秉烈)정무수석등 내로라하는 권력의 중추들이 모두 모여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통합」주장을 강력히 제기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참석대상도 아닌 김용갑(金容甲)총무처장관이었다.6共 창업공신의 한사람인 金장관은「정권을 만들어냈다」는 자긍심에다「국정의 일임을 맡았다」는 소신,나서길 좋아하는 성격등으로 자 기 업무가 아니라도 중요한 일이 생기면 곧잘 청와대로 달려가곤 했었다.밤새 개표결과를 보면서 고민하던 그는 그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육사선배인 안기부장을 찾았다.
安부장은 물론 궁정동회의에 가고 없었다.金장관은 궁정동으로 전화를 돌렸다.安부장으로부터『그렇지않아도 대책회의중』이라는 얘기를 듣고는『지금 갈테니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곧장 궁정동으로달려갔다.
회의장에 도착한 金장관은 침울한 얼굴들을 향해『무슨 대책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시원한 대답이 나올리 없다.金장관은 이자리에서『통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처음「통합」을 주장했다.
물론 갑론을박(甲論乙駁)은 있었다.「그런 극약처방까지 필요없다」는 반대론은『6.29선언을 하고 대통령선거를 치를 당시 정권을 뺏길 경우까지 각오하지 않았었느냐.이정도 가지고 그럴 필요 있느냐.과반수는 못되지만 아직 압도적 다수의 제1당이다.정국을 이끌어갈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단 최선을 다해 정국을 이끌어가자」는 관망론과「통합까지는필요없고 정책연합을 하자」는 절충론까지 포함해 반대론이 우세했다.그렇지만「공화당하고만 통합하자」는 일부 찬성론도 만만치않았다.『어차피 공화당은 같은 뿌리고,공화당과 합당 만 해도 과반수는 넘는다』(공화당이 35석으로 합당할 경우 1백60석으로 과반수 1백50석을 넘는다)는 요지였다.
민주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았고 평민당과의 통합은 거의 언급되지도 않았다.
결론은 확실치 않았다.더욱이 「통합」이라는 극약처방은 대통령면전에 보고하기조차 힘들어하는 분위기였다.저돌적인 소신파 김용갑장관은 『내가 직접 건의하겠다』며 안기부장과 함께 청와대로 올라갔다.
盧대통령 역시 침통한 표정이었다.막상 참모들에게는 『전부 하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자』며 위로했지만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막막하지 않을수 없었다.
金장관은 『각하,통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어려울 것 없습니다.김종필총재와는 생각도 서로 틀리지않으니까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김영삼총재하고도 얼마든지 같이 해나갈수 있습니다』라며 곧장통합문제를 역설했다.그런데 그도 평민당과의 통합 은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육사 17기 출신으로 5共전반기 최장수 안기부 기조실장을 역임한 경력으로 미뤄 김대중(金大中)총재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않게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盧대통령의 반응이다.盧대통령은 뜻밖에도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리고 그자리에서 안기부장에게『安부장,그거 한번 검토해보지』라고 지시했다.
물론 이같은 반응이 곧 통합결심이라고 보기에는 이르다.盧대통령은 극히 신중한 성격이다.흔히 박정희(朴正熙).전두환대통령과盧대통령을 비교해 말할때「朴대통령은 치밀하게 계산한뒤 한걸음씩내딛고,全대통령은 계산에 앞서 걸음부터 내딛고 ,盧대통령은 계산만 하고 걸음은 내딛지않는다」고 비유될 정도다.
盧대통령으로 하여금 통합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한 최초의 사건은 그해 7월2일 돌발한 정기승(鄭起勝)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의 부결이었다.여소야대 국회의 첫 표결이자 대통령의 사법부 수장임명이라는 핵심권한이 헌정사 초유로 비토된 것이 다.대통령은『일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거야』라고 화를 냈지만 여소야대라는 구조적 한계를 어쩔수는 없었고 88년 당시까지만 해도 통합은 소수의견에 불과했다.이때문에 보다 현실적인 대안은 확실한 정책연합,주로 제1야당인 평민당을 의식한 것들이었다.
물론 공화당은 당연히 민정당편으로 간주되었다.나아가 보다 본격적인 연정이나 통합의 고리는 내각제로의 개헌으로 희미하게나마알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이때부터 6共의 실세 박철언(朴哲彦)청와대 정책보좌관은 거대한 정계개편의 구상을 가지고 직접 兩金(김대중.김영삼총재)씨를 상대로 뛰고 있었다.
이같은 흐름속에서 정계개편의 움직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것은 88년8월.가장 먼저 여론타진용 풍선을 띄운 사람은 윤길중(尹吉重)민정당대표였다.여권의 핵심은 아니었기에 그의 발언이직접 대통령의 의중으로 연결되기에는 모호하지만 집권여당의 대표라는 위상이 애드벌룬에 무게를 싣게 하고 있었다.필리핀을 방문중이던 尹대표는 8월2일 숙소인 마닐라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내각제로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내년 봄으로 예상되는중간평가를 전후해 내각제로의 전 환문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것』이라며 내각제개헌을 역설했다.
尹대표는 평소 내각제론자이긴 하지만 개헌의 필요성과 함께 추진 스케줄까지 발설한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물론 발언은 사전에 조율된 것이다.尹대표는 최근 『당시 여권의 핵심이었던 김윤환(金潤煥)총무와 사전에 발언을 협의했다 』고 밝혔다. ***內閣制 슬쩍 비춰 예상대로 정계의 반응이 민감하게 나타나자 6共 정부는 「尹대표의 개인의견」이라는 식으로 슬며시 발을 뺐다.盧대통령은 尹대표가 귀국하자마자 불러 『나도 개인적으로 尹대표 같이 내각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꺼냈다가는 오히려 정국에 혼란만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덮어버렸다.
盧대통령이 직접 야당의 3金 총재에게 여러가지 정계개편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바로 그 직후인 8월말 개별연석회담으로 알려지고 있다.올림픽을 앞둔 정치휴전등 협력을 당부하는 자리이기도했지만 3金씨의 의중떠보기도 중요한 한 목적이었 다.가장 적극적으로 나온 사람은 김종필총재였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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