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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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써니…? 걔 얘긴 꺼내지마.말해봐야 서로 마음만 아프잖아.
』 말하면서,양아는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나는 양아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다그쳤다.
『이러지 마.나도 감이라는 게 있다구.그리구 난 농담할만큼 마음이 넉넉하지 못하다구 요즘은.써니 어딨어?』 『난 무슨 소린지 못알아 듣겠어.너… 아직도 써닐 못잊은 거야?』 양아도 내 표정이 너무나 굳은 것이 이상했는지 정색을 했는데,그러는 양아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틀렸구나 싶었다.주문받는 사람이 옆에 와서 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커피를 시켰다.양아가 무얼 주문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나는 더 할 말이 없어져 한동안멍청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창밖엔 수업을 끝낸 여대생들이몇몇씩 아니면 뿔뿔이 지나가고 있었다.써니와 비슷비슷한 여자들이 많이 지나갔지만 물론 거기에 써니는 없었다.
『차 마셔.난 그저…오랜만에 서울에 왔다가 네 생각이 나서…그래서 전화했던 것 뿐이야.넌 내 생명의 은인이잖니.』 양아가살짝 웃으면서 날 보았는데 내가 따라 웃지 않으니까 자기도 미소를 거두고 또 말했다.
『그런데 그게…달수 너를 괴롭히게 될 줄은 몰랐어.미안해.』『아니야.나도 니가 궁금했었어.정말이야.널 만난 건 기쁘다니까.』 나는 양아에게 무언가 실수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말했다.그리고 다시 양아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몇년만에 보는 양아는 몰라 보게 날씬해져 있었다.어쩌면 얼굴을 부분적으로 성형했는지도 몰랐다.몇년전에 보았던,뚱보에 별 특 징없던 여고생이 아니었다.
『나 많이 변했지?』 양아가 내 느낌을 알아차렸는지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정말 몰라보겠어.피나는 노력이 있었을 거야.이렇게 예뻐지기까지는 말이지.연극영화과라면 나중에 탤런트가 되는 거니?』 『내 친구가 너희 학교에 다니거든.너 소문났던데…무슨 탤런트하던 여자애하고 찰떡처럼 붙어다닌다고 말이야.』 『맞아,윤소라라고 있어.같은 과 앤데 친한 편이야.그 정도라구.』 『소문은 그 정도가 아니던데… 나한테야 변명할 거 없잖아.』 양아가살짝 눈을 치켜뜨고 나를 살폈다.
『너한테 굳이 과장할 필요도 없잖아.정말 그 이상은 아니라니까.』 『국문과면…넌 소설같은 거 쓸 거니?』 『아마.소설이 제일 만만하잖아.밑천도 안들고….』 『글쓰는 사람들은 가난하잖아.만약 써니가 없어지지 않고…나중에 써니하고 너하고 잘 됐었어도 말이야 어땠을까….』 양아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담배를 피워 물고 계속했다.
『어디 산동네같은 데에 사글세방이나 하나 얻어서,아직도 연탄불 갈고 그러는 집에서 말이야,너는 며칠씩 세수도 안하고 수염도 깎지 않아서 덥수룩하구… 너는 하루종일 궁상맞게 파자마나 러닝셔츠나 그런 거 입구 있구… 그러지는 않았겠느 냐구.안그래…? 내 말은… 꿈 깨라는 얘기야.』 나는 다시 창밖을 한동안내다보았다.양아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난… 써니를 지금처럼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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