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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시 ③

중앙일보

입력

로시난테 달리자! -- 박지웅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문학동네

1

이 길을 방류하는 것은 언덕의 집들이다

섬마을 언덕에서 흘러내린 길은 모두 포구에서 만나 바다로 흘러든다. 언젠가 아이들은 이 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게 되고 누구나 한 번은 오가게 되는, 이 언덕길은 이곳 사람들의 모천인 셈이다. 그러니 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섬을 나가는 것은 모두 연어일 뿐이다.

2

때가 되면 집들은 스스로 수문을 연다

이 길의 냄새를 익힌 치어들의 지느러미에 힘이 붙고 그 흰 몸 달아오르는 달밤, 아이들은 하나둘 포구로 내려와 바다에 슬며시 몸을 눕힌다. 그렇게 달동네 같은 섬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섬이 펼치는 진(陣)은 진기하다. 길을 나선 이들 대부분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 길이 가진 권능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때가 되면 몸속에 부풀어 오르는 집터의 냄새 때문이다. 그리움의 발진이 옆줄부터 붉게 감돌면 그때, 이미 반수 이상이 떨어져나갔다. 곳곳에 펼쳐진 삶이 진들을 지나 다시, 섬으로 돌아오는 저들 또한 세상이 거두어간 일행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3

길이 부를 때는 떠나야 한다

거역으로 완성되는 삶은 없다. 섬이 부를 때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 가슴으로 문지르며 그 섬길을 올라야 한다. 가파른 입을 가진 상류에 이르면 신비로운 물의 악기를 만나게 된다. 그 관문을 통과하는 길은 하나, 길이 가진 낙수의 악보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집터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오르면 오르는 대로 떨어져나가도, 산 채로 완성되는 생은 없으므로.

4

한차례 긴 물의 연주는 끝나고

나무토막처럼 흘러가는 몸들, 꽃잎처럼 흘러가는 영혼들, 길에 드는 것은 길에 진다는 것이다. 굽이진 물의 봉우리 다 넘어온 저들, 물과 땅의 경계를 흔들어 그 환한 알들, 섬 자궁에 포개어 넣는다. 천천히 뒤집히며 길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 <길에 지다> 전문

1

시인은 길과 길 떠나는 이들의 관계를 뒤집는 것으로 시를 시작한다. 길의 주인 혹은 주어는 길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길이야말로 주인-주어라는 것이다. 떠나는 자가 떠남으로써 떠돎으로써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를 밖으로 풀어놓을 뿐이라는 것이다. 길에 의해 우리는 방목(放牧)되는 셈이다. 방목에는 울타리가 있다. 울타리가 가리키는 길은 얼핏 보면 나가는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길은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이다. 주어로서의 길은 그만큼 강하다. 그 길은 때가 되면 스스로 문을 열고, 또 길이 부를 때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이 길이 가진 권능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같은 길과 떠나는 자의 관계 혹은 스펙터클을 시인은 연어의 행로에 이어 붙인다. 길 떠나는 우리는 연어다!

2

길 떠나는 자는 연어다. 연어는 자신이 떠났던 곳으로 돌아와야만 그때 비로소 연어가 된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연어는 돌아올 때까지 연어가 아니다. 시인이 주목하는 로드서쳐road searcher들은 바로 이 돌아오는 연어들이다. 그러나 시인은 너무 빨리 회귀를 발설하고 희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너무나 빨리 길 떠남과 돌아옴을 정형화 시켜버린 것은 아닐까?

3

길을 떠나면 우리 모두는 제각각 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되어야 마땅하다. 질풍노도가 그렇고 세상 끝으로의 여행이 그렇고 미로가 그렇다. 그러나 시인은 길 위에서 오디세우스가 겪는 모험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전체 여정, 곧 떠났다가 돌아온다는 그 행로의 완성에 유독 초점을 맞춘다. 방목지를 뚫고 나가려는 거친 질주가 아니라 돌아와야만 하는 귀환의 숙명에 더욱 더 애착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미지에의 탐색, 운명의 미로에도 관심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는 모든 오디세우스는 단 하나의 오디세우스, 곧 귀환한 오디세우스뿐이다. 그래서 조금 과감하게 말하면, 시인의 상상력은 남성적이고 동적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이고 정적이다. 왜 그럴까? 시집 전체를 통해 그의 상상력을 쫓다보면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이 대목에서 나는 시인의 이력이 궁금해져서 책 앞날개를 살펴본다. 시인은 이제 마흔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첫 시집이다! 혹시 시인이 일종의 페시미즘에 빠져 너무 일찍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4

몸이 벽 너머 몸에게 말을 건다
너의 반은 꽃이다
너의 반은 귀신이다
그러면 편히 잠들라, 그리운 쪽이여
- <너의 반은 꽃이다> 마지막 부분

‘꽃’과 ‘귀신’이 한 몸이라면 과연 그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시인은 그 존재를 “그리운 쪽”이라고 말하며, “편히 잠들라”라고 기원한다. 그 기원을 길과 연관시켜 말해보면 어떨까? 꽃의 길과 귀신의 길! 길에도 어쩌면 꽃과 귀신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밝음과 합리, 아름다움이 한 쪽이라면 어둠과 해매임, 불모가 다른 한 쪽에 포진해 있는 그런 이중성. 그 이중성이야말로 시인이 길에 부여한 일종의 형이상학인 셈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분된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고 다만 “그리운 쪽”이라고 뭉뚱그려 말함으로써 둘 모두를 아우르고자 한다. 길을 떠났다가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귀신으로 피는 꽃 곧 ‘꽃-귀신’이거나 귀신이 피우는 꽃 곧 ‘귀신-꽃’이거나. 그렇게 연어도 돌아와야만 한다. “오르면 오르는 대로 떨어져나가도, 산 채로 완성되는 생은 없으므로.”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궁극적으로는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페시미즘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나는 페시미즘 특히나 젊은 시인들의 페시미즘이 싫다. 그 누구도 삶의 끝까지 낙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페시미즘을 주름살처럼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때도 페시미즘은 결코 늦지 않다. 그러니 제발이지 페시미즘을 앞당겨 세상을 늙게 만들지는 말아주기를 감히 소망한다. 시인이 늙으면 세상은 반드시 늙는다. 늙은 세상의 길은 갇힌 길들로만 이루어진다. 그때 연어는 바다를 맘껏 헤엄치는 어류가 아니라 그저 귀환을 운명으로 강요당하는 불쌍한 물고기일 뿐이다. 적어도 나는 아직까지는 질주하는 자들이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거역으로 완성되는 삶은 없다.”라고 단언하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길의 주어라고 우기고 싶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보다는 크라잉넛의 <말달리자>가 아직은 애써 좋다. 내 몸과 마음의 실상은 비록 동키호테의 늙은 애마 로시란테일지언정.

글∥김용필, 북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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