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철새,갈대, 그리고 해맞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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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34면

1. 봄이면 찾아오는 민물도요의 비상하는 모습

여느 때와 같았다. 12월 31일 11시59분이 1월 1일 0시0분이 되는 그 시각에 나는 텔레비전 앞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방송 3사의 연말시상식을 부주의하게 돌려보는 중이었다. 해마다 그 시간의 주인공들은 TV스타들이거나 보신각 타종을 보기 위해 종로를 가득 메운 군중이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보아온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춘기 이후 서른셋이 될 때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새해를 맞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 년 중 하루쯤은 일분일초에 무진장한 의미를 부여하고 살짝 호들갑스런 이벤트를 마련할 필요가 있음을 안다.
게다가 새해 첫날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만들기에 썩 괜찮은 날이다.

2. 멀리 희미하게 붉은 기운으로 깨어나는 땅과 하늘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런 날을 놓치지 않는 것이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드는 비결인 것도 분명하다. 다만 지금껏 실행하지 못한 것은 그 죽일 놈의 게으름 탓이다. 그 탓에 1월 1일을 덤으로 얻은 휴일쯤으로 만들기를 십수 년째. 유유상종인지라 그러한 새해맞이 태도를 지적하는 친구들 또한 없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었다면 아마도 0시1분쯤 현관을 박차고 나와 동해행 심야 드라이브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현실 속의 우리 일반인들은 대개 그럴 수 없다. 우선은 잠을 청하고, 늦은 아침이 되어야만 친구들을 부추길 수 있을 것이다. 새해 첫날의 일출이 아니라 한들 대수인가, 갈대밭 너머로 새해 첫날의 일몰을 바라보는 것도 나름대로 좋지 아니한가, 이런저런 말로 난데없는 호들갑을 떨어 길을 나섰다. 행선지는 서울과 가까운 바다 시화호.

3. 안산 시화호 갈대숲은 사람 키만 한 높이로 사람들의 발길을 반긴다.

오이도와 방아머리 사이에 들어선 12㎞ 길이의 시화방조제는 서해를 절반의 바다와 절반의 호수로 갈라놓고 있었다. 쾌속 주행하는 차를 맨 처음 멈춰 세운 곳은 시화호 습지의 갈대숲이었다.

하필이면 올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새해의 시작을 코앞에 두고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고, 덕분에 아무리 고개를 파묻어도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방법은 딱 하나였다.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바람을 맞는 것!

사람 키를 넘고도 남을 만한 갈대 사이를 헤집는 바람 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갈대들은 유연하게 휘어지며 거센 바람을 요령껏 타고 노는 듯했다. 갈대와 바람은 마구잡이로 거세게 얽히는 것 같아도 나름의 질서와 법칙 속에서 리듬감 있게 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갈대의 저 유연함과 강인함이 극심한 오염으로 사망선고 직전에 놓여 있던 이곳 시화호의 환경을 복원시켜 놓은 힘이기도 했다. 저기 저곳에서 삶을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그 어떤 것들이 자신을 내던져 춤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춤사위는 투명했다.

감히 갈대와 겨울바람 사이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어 그저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두 뺨과 귓불은 시렸으나 가슴 아래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서른셋의 세 사람은 비슷한 자세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서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먼저 서른셋은 완벽한 숫자의 완벽한 조합이지만 꽤 애매한 나이라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새로운 꿈을 펼치기는 어쩐지 조금 늦은 듯하고, 날개를 접자니 지나치게 이른 듯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자면 세상의 온갖 처세술 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자기 삶의 미세한 원칙들을 새롭게 만들거나 조절하기에 가장 적정한 시점이기도 했다. 그래야만 저렇게 단단하게 땅에 뿌리내리면서도 바람이 전하는 소리에 휙 몸을 굽혀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한 계절 서둘러 이곳에 왔더라면 아마 갈대밭에 내려앉은 풍요로운 낭만을 만끽하며 여유롭게 산책을 즐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계절의 따뜻한 낭만이 아쉽지는 않았다. 대신에 갈대밭 너머로 펼쳐지는 새해 첫날 일몰 풍경의 주인공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갈대와 겨울바람의 투명한 춤사위에 깊숙하게 감정이입한 탓에 일몰에도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이게 시작하는 날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사진 중앙일보


글쓴이 장은은 출판사에 근무하는 편집자로 1년에 365권 이상 되는 엄청난 독서량과 사색의 양을 자랑하는 열혈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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