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작가 송숙희의 ‘펀펀’칼럼] 끌리는 대로 지른다… My wonderful life!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서른 살 이지현 씨. 아내와 두 아들을 거느린 가장인 그는 ‘땅끝마을’에 개원한 치과의사다. 그런 이씨에게 요즘 살 맛 하나가 더 생겼다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지현 씨의 즐거운 포트폴리오 인생!


딱 10분, 고민했다. 치과의사 이지현(30) 씨는 팬션처럼 예쁜 외관의 건물을 보는 순간 여기서 개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앞서 계약한 건물에 걸었던 계약금 500만 원도 그 자리에서 포기했다.

아내? 부모님? 누구한테도 동의를 구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그 역시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 깊은 시골에서 임플란트 시술이 먹힐까’ 하는 우려도 아주 잠시. ‘잘 안 되면 다시 하지 뭐’ 하고 결론을 내렸다. 딱 10분 걸렸다.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에 연 그의 치과 의원은 하루하루 입소문이 퍼져 인근 마을에서는 물론 진도나 목포에서도 환자들이 찾아 든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시골마을은 해 뜨기 무섭게 움직이고, 날이 설핏해도 인적이 끊긴다. 마지막 환자가 가고 나면 그도 미련 없이 퇴근한다.

그의 출·퇴근길은 혼자가 아니다. 네 살배기 큰아들 건희와 함께다. 건희는 병원 근처 놀이방에서 놀다 아빠를 따라 퇴근한다. 돌도 안 된 둘째를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아내를 위한 배려다.

퇴근 후 지현 씨가 집에서 하는 일은 전적으로 두 아이를 담당하는 것. 그 사이 아내는 빠른 손놀림으로 입맛에 딱 맞는 저녁을 차려 낸다. 주말이면 광주로, 순천으로 부모님과 할머니를 찾아 뵙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지현 씨의 낙(樂).

지난해 4월, 병원을 연 이후 그의 동선은 이렇게 병원과 집이 전부였다. 부족함 없이 하루하루 느꺼운 날들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살 맛 나는 샛길이 하나 더 생겼다. 초등학교 때 선수생활을 하던 미련을 버리지 못해 늘 글러브를 끼고 살던 야구, 그 야구를 집 근처에서 마음껏 하게 됐다. 사회인야구단이 창단돼 주말 이틀은 야구에 빠져 산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다.

‘땅끝마을’에서 병원을 열다

당초 병원을 열려고 했던 곳은 부동산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던 수도권 신도시의 한 아파트 상가. 애초 계획대로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했더라면 그 역시 다른 선배 의사들처럼 당연히 병원 입지를 중심으로 부동산 재테크에 눈 떴을 테고, 한 30년쯤 지난 후에는 여느 부유한 의사들처럼 수십억 원대의 건물주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계약금 500만 원을 포기한 것은 남들 다 가는 잘 알려진 길, 별다를 것은 없어도 웬만해서는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그 정해진 길을 스스로 포기한 증거다. 아예 병원에서 15분 거리인 해남읍으로 이사까지 했다. 무엇이든 하려면 제대로 하기, 이지현 씨의 소신이다.

그 후 8개월. 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은 일이나 목적이 없이도 대처에서 살고 싶어하는 혈기 방장한 서른 살 그가, 도시인으로 뼈가 굵은 그가 시골살이를 잘 해내고 있을까?

놀던 물이 그립거나 하던 가락이 그립지는 않을까? 호기는 좋았지만 내심 많이 후회하고 있겠지? 삐딱한 호기심을 품고 이지현 씨를 만났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에게서는 어떤 후회나 아쉬움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일찌감치 삶의 저잣거리에 맨발 디디고 서서 살뜰하게 즐기며 사는 숨은 기술을 배워 왔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고 했던가? 그는 일과 가족과 자신에게 공평하게 분산투자함으로써 일에 모든 것을 거는 기존 투자의 위험을 애초에 피했다. 그러면서 투자수익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었다. 명민한 포트폴리오 인생이다.

포트폴리오 1
“일, 일단 시작하면 길이 보인다”

2007년 4월6일. 이지현 씨가 3년 근무한 공중보건의를 마치던 날 아내는 아침부터 산통을 시작했고, 예정일보다 1주일이나 빨리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이 경황없던 날, 그는 병원문까지 열었다.

‘땅끝’이라는 별호(別號)를 꼭 붙여 불러야 비로소 알아듣는 전라남도 해남군. 이곳에서도 더욱 땅끝에 가까운 황산면 남리리. 이지현 씨의 치과는 반듯하게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했다.

면 단위라고 해야 모두 합해 8,000여 명의 주민이 전부인, 농사를 짓거나 그도 힘에 부치는 어르신들은 소일거리 삼아 마늘이며 배추며 고구마를 심고 가꾸는…. 서쪽으로는 진도와 목포가, 북쪽으로는 해남읍이, 동쪽으로는 강진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에둘러 싼 깊디 깊은 남쪽마을(南里)이 이곳이다. 닷새마다 서는 장은 지금도 이곳 사람들의 유일한 소통의 현장이다.

이 시골마을에 지현 씨가 치과를 개원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단 하나, 치과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노령인구가 전국에서 제일 많은 지역이라지만 임플란트처럼 돈이 많이 드는 시술은 인근 대도시에 나가 받는 것이 상례이고 보면 문을 연 지 8개월 만에 병원이 자리 잡은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마치 그의 말처럼.
“저는 운이 좋거든요.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운칠기삼(運七氣三), 운이 잘 따라줘요.”

가깝게 지내는 동기생이나 선배 의사들은 대도시에서 병원을 열어 그새 문을 닫았거나 개점휴업 중이다.

“사실 인구가 많은 대도시는 경쟁도 그만큼 치열해요. 규모의 경제를 위해 여러 의사가 모여 대형 치과병원을 개업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또한 성공률이 희박해요. 그러니 대도시에 개원한다는 것은 여기서 이렇게 시작하는 것보다 더 큰 모험이고 도전일 수 있지요.”

“치과를 연다고라? 정맬요?”

“치과는 돈이 많이 드는디? 장사가 될랑가 몰러라.”

치과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자 주민들은 반가운 마음 절반 짠한 마음 절반이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대부분인 작은 마을에 객지 사람이 들어와 병원을 차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장모님의 지인을 통해 병원 자리를 소개받은 것이 연고의 전부였다.

그는 광주 태생이다. 1997년, 나라 안팎이 없는 설움에 휘청거릴 때 그는 남들 다 부러워하는 대학의 신입생이었다. 외풍은 그에게도 어김없이 몰아 닥쳤다. 이때도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만류할 틈도 주지 않고 다니던 대학을 그만뒀다.

원장님은 사근사근한 막내 사위

그리고 이듬해 조선대 치과대에 다시 입학했다. 방향이 정해지면 경주마처럼 집중하는 것이 그의 특성. 그가 설정한 의사로서의 목표는 임플란트만큼은 전국 최고수가 되겠다는 것.

졸업 후 전라남도 함평에서 공중보건의를 하며 의사생활을 실습했다. 주말이면 전국의 유명한 치과와 치과의사를 찾아 다니며 배웠다. 휴가를 모아 해외 임플란트 시술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그 열정에 반한 여러 곳에서 공중보건의를 마치면 같이 일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개원을 계획했던 지현 씨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손길이 아니었다. 그는 치과들을 예의주시했다.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경험과 통찰을 확보했다. 잘되는 치과가 몇 가지 공통의 이유가 있듯 안 되는 치과 역시 그랬다.

“원장인 의사가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고 진료에 임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비싼 시술인 만큼 치과마다 임플란트를 상담하는 코디네이터를 두는 것이 유행처럼 됐지만, 아무리 잘 교육받은 세련된 코디네이터가 1시간 상담하더라도 의사와 직접 상담하는 10분만 하겠어요?”

그는 시중 병·의원에 유행처럼 번지는 ‘의사는 진료와 시술만’이라는 구분에 동의할 수 없다. 의사와 병원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환자에게는 상담부터 진료라는 것을 눈치챘다. 단 10분이라도 의사와 직접 상담하고 싶은 것이 환자의 마음이었다. 또 잘되는 병원은 상담에서 진료, 수술, 회복 후 상담까지 전 과정을 의사가 도맡아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아직 임플란트 시술은 비싸고 두렵고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병원 앞을 기웃거리기만 했다. 지현 씨는 그런 어르신을 모시고 들어와 최소한 30분씩 상담했다. 첨단 디지털 장비와 시술 과정을 일일이 안내하고 나면 상담한 어르신의 90%는 시술을 결심했다.

빠른 시간에 환자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기억력 덕분이었다. 이름을 외우는 것은 기본. 주고받은 이야기까지 끄집어내 물어보니 환자들은 사근사근한 막내 사위 대하듯 좋아한다. 사흘 전에 나눈 이야기를 기억했다 말해주는 지현 씨가 반 년에 한 번씩 보는 큰아들보다 더 살가울 것이다.

“저는 의사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폼 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료 서비스업 종사자라고 생각해요.”

그는 출근할 때 아내에게 이렇게 인사한다.

“여기 간과 쓸개 빼놓고 가네. 잘 보관했다 저녁에 주소.”

그의 병원은 임플란트 실습을 다니며 눈여겨봐둔 치과 진료 및 수술에 필요한 최신·최고의 설비를 모두 갖췄다. 심지어 파노라마 엑스레이 촬영기까지 갖췄다. 어르신 환자들이야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어디에 쓰이는지는 몰라도 설비를 대할 때마다 병원에 갖는 미더움이 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무엇을 어디서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잘할 수 없으면 다른 곳이나 다른 때에도 잘할 수 없지 않을까요?”

공중보건의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체득한 어르신 환자를 대하는 요령은 병원이 자리 잡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고, 택시를 불러 타고, 경운기에 모여 타고 병원을 찾는 어르신들이 의사에게 원하는 것은 주사와 약이 아니다. 관심이다.

자식들과 떨어져 고향에 홀로 혹은 내외가 남은 어르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장한 관심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반겨 주는 것이다. 이물 없이 구는 막내 사위의 마음이다.

포트폴리오 2
“끌리면 한다. 즐거운 인생”

병원이 자리 잡아가는 듯하던 어느 가을날, 출근길에 뜻밖의 현수막을 발견했다.

‘해남야구단모집.’

인터넷 주소만 달랑 적힌 그 현수막. 야구, 그 두 글자를 보았을 뿐인데 벌써 가슴이 벌렁거린다. 야구라니, 이곳에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말이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가입 신청을 했다. 해남군은 전국 84개 군 가운데 가장 큰 면적을 자랑하지만 그 흔한 야구장 하나 없다. 야구 연습장도 없고, 동전 넣고 공을 치는 타격연습장도 하나 없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초·중·고 어느 곳에도 야구부가 없다. 축구나 배구 동호회는 많아도 배트와 글러브·공을 가지고 노는 아이나 어른을 본 적은 없다. 이 같은 야구 불모의 땅 해남에 야구단이 생긴다니 꿈만 같다.

2007년 12월6일 목요일, 오후가 되자 문자메시지가 쏟아진다.

“이 코치, 이번 주는 별일 없지? 나올 거지?”

“이 코치, 이번에는 몇 명이나 모일랑가?”

“어이, 이 코치, 나는 2루수로 뛰게 해주소?”

홈런보다 감격스러운 단원들 목소리

이제 겨우 목요일인데 단원들은 벌써 몸과 마음이 근질거려 그냥 있지 못한다. 연신 전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인터넷 카페에 매달려 위로받는다.

실은 그도 마찬가지다. 진료가 없는 시간에는 글러브라도 만지작거려야 직성이 풀린다. 해남야구단은 출범한 지 두 달 만에 정식 단원이 40명이나 되는 제법 규모를 갖춘 사회인야구단으로 초특급 성장했다. 전용 구장이 없어 번번이 원정을 가야 하지만 1주일에 이틀, 토·일요일이면 연습에 시합에 다른 생각할 짬이 없다.

2007년 12월7일 금요일, 아내의 눈치를 보며 야구 유니폼을 꺼내 다림질한다. 아직 미혼인 친구들이 수두룩한 아내는 두 아들 건사에 죽을 맛이다. 그러니 야구를 하려면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야구 유니폼을 직접 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나마 세탁이라도 해주었으니 고마울 뿐. 가능한 한 빨리 다림질을 끝내고 벽에 걸어두니, ‘어휴’ 몸이 더 근질거린다.

이지현 코치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와 늘 함께했다. 초등학교 때는 선수생활도 했다. 운동보다 공부 잘하는 아들을 더 바라신 부모님 덕에 선수생활을 포기했지만 학교생활 내내, 공중보건의를 하면서도 손에서 글러브를 놓지 않았다. 김병현 선수가 절친한 친구이기까지 하니 야구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질 리 없다.

오늘이 금요일, 이제 내일이면 야구를 한다. 지난 한 주 할머니를 뵙고 오느라 빠졌더니 더 죽을 맛이다. 일요일에는 두 게임이나 벌어진다. 이 코치는 두 게임에 출장할 라인업을 짜느라 머릿속이 분주하다.

2007년 12월8일 토요일, 오늘은 장날이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아침잠 없는 어르신들이 장을 보러 모여든다. 치과도 가장 바쁜 날이다. 지현 씨는 다른 날보다 출근을 서두른다. 좀 더 속도를 내 도착했는데도 진료실에는 여러 어르신이 대기 중이다.

“김전분 님 오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황우구 님,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셨어요?”

병원문을 들어서며 눈이 마주치는 대로 이름을 불러드리며 아는 체하면 주름 골 깊게 팬 검은 얼굴들이 반갑게 화답한다.

아들보다 더 살가운 젊은 의사가 기특해 자기 아들네 주려고 싸두었던 참깨며 찹쌀이며 하루 종일 굽은 허리로 딴 굴 한 봉지까지 봉지봉지 내미는 어르신들.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먹을거리다.

점심시간도 없이 진료를 한다. 마지막 환자를 문밖까지 따라나가 배웅한 후 지현 씨는 득달같이 야구단에 합류한다.

오늘은 해남야구단에 또 하나 의미가 생기는 날. 연습장 하나 없이 두어 달 동안 널따란 공터나 폐교 운동장을 전전하며 연습하던 구단이 드디어 전용 연습장을 확보한 것이다.

연습장에 도착하니 운동장이 장미꽃밭 같다. 유니폼을 폼 나게 챙겨 입은 단원들이 점점이 운동장에 흩어져 소금을 뿌린 땅을 다지고, 타석 뒤편으로 백 네트를 치고….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2007년 12월9일 일요일, 창단 이후 두 달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토요일에는 연습하고 일요일에는 경기를 했다. 전용 연습장이 없어 손 한번 제대로 맞춰보지 못한 팀이 첫 경기를 갖던 날. 20점 이상은 주지 말자며 기염을 토했는데 완도 해신팀에 12대 13으로 석패했다. 이후 완도 주도치우팀과 각각 15대 15, 15대 16이라는 성적을 내고, 세 번째 시합인 목포팀과의 대결에서는 3점차로 첫 승을 거뒀다.

오늘은 2게임이나 벌어지는 날. 25세부터 51세까지, 나이도 직업도 경력도 야구 실력도 다양한 40여 명의 선수를 적절하게 나눠 시합에 배치하고 라인업을 짜는 일이 다른 날보다 더 어렵겠다.

라인업의 원칙은 전원을 게임에 투입하는 것. 일요일 저녁부터 벌써 다음주 토요일을 기다리는 단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도 좋지만 두루 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우선이다.

일요일 원정 경기 때 가족을 동반하는 단원이 늘면서 새로운 가족 나들이 풍속도까지 생겨났다.

“내 평생 토·일요일이 이렇게 기다려진 적이 없네” 하는 단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또 “나 오늘 홈런 쳤다네” “나 오늘 안타 나왔네” 하고 다 아는 사실을 일부러 전화해 한 번 더 말하는 단원을 보는 일은 홈런을 칠 때보다 더 감격스럽다. 그런 지현 씨에게 친구들이 한마디씩 한다.

“야구 말고 골프를 해라. 골프는 사업에도 도움이 되고 나이 들어서까지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우정 어린 충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나이 들어서나 생각해볼 거리다. 쉰 살이 넘었는데도 더 바지런한 선배 단원을 생각하면 ‘나이들면 할 수 없다’는 전제는 핑계지 싶다.

포트폴리오 3
“열정의 영원한 원천, 가족”

“저는 애늙은이랍니다. 결혼을 일찍 해서인지 일찍 철이 들었어요.”

장손이어서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그 역시 가족에 대한 애정과 염려가 유난하다. 야간진료를 하지 않으니 저녁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가족과 함께한다.

도시에서 병원을 열었더라면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보기 위해 그 역시 야간진료에 휴일 진료를 자청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상대적으로 가족에게 할애하는 시간부터 줄었을 것이다.

건희가 두어 살 더 먹으면 건희와 함께 출퇴근하는 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고, 남자끼리의 연대감이나 비밀도 생겨날 것이다. 감기 끝물에 폐렴을 앓고, 태어나자마자 아토피 증세를 보이는 두 아들에게는 시골살이가 그만이다.

아이들은 보고 배울 것이 많은 도시에서 키워야 한다는 지인들의 염려 어린 충고를 들을 때마다 그는 웃고 만다. 어디서든 보고 배울 것은 충분하며, 두 아이가 많이 자랐을 때는 공부를 어디서 하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게 공교육이 변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다.

스무 살에 만나 7년 연애 끝에 결혼한 한 살 어린 아내는 천군만마다. 다른 젊은 여자 같으면 남편 혼자 시골로 내려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착한 아내는 몇 번 거부하는 척하더니 지현 씨의 소주를 앞세운 설득에 넘어갔다. ‘싫네, 좋네’하는 마지막에는 남편의 선택을 믿어준다. 부모님처럼 막판 결정에는 철저하게 힘을 실어준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순천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온 가족이 움직인다. 어릴 때 할머니 치마폭에서 큰지라 한참 할머니를 못 뵈면 서운하다. 조만간 혼자 계시는 할머니를 해남으로 모셔와 같이 살겠다는 계획도 세워뒀다.

아내 역시 치매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경험이 있어 할머니를 모셔다 살자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아이들도 연로하신 할머니의 사랑과 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가족애를 알며 자라게 하고 싶다.

하기는 그렇다. 남자 나이 서른 살, 미래를 탐색하기에도 버거울 수 있는 나이다. 결혼해서 새 가정을 꾸리는 것도 만만찮을 나이다.

하지만 서른 살의 그는 결혼에 사업에 두 아들에…. 성인남자에게 요구되는 책무를 이행하는 데 소홀함이 없다.

“저도 공부에 대한 부담을 크게 지고 살았어요. 공부를 좀 하면 온 가족이 기대하잖아요.”

공부만 하고 살아온 그에게 대학에서 만난 경향 각지의 친구들은 큰 자극이었다. 반드시 공부를 잘해야 하고, 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온 삶이 친구들로부터 다양한 자극을 받으며 변하기 시작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따로 없음을 알게 됐다.

다시 대입을 준비하고 치과대 6년을 다녀 졸업하는 동안 돌아가는 듯싶은 길이 지름길이 될 수 있음도 알았다. 지름길이 가시밭길일 수 있음도 알았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인생이란 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눈치보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왜요. 저도 사람인데 당연히 큰물에서 놀고 싶습니다. 하지만 큰물에서 논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지요.”

2루를 떠나지 않으면 3루에 닿을 수 없다

임플란트 실습을 위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크고 작은 치과병원을 경험하며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선배 치과의사들의 삶은 겉보기만큼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 집 건너 치과인 경쟁 상황에서 생존하려면 더 좋은 목을 잡아야 했고, 더 번듯한 건물에 병원을 입주해야 했고, 더 많은 돈을 들여 실내 장식을 해야 했다.

직장인들의 편의를 위해 야간진료는 물론 환자가 원하면 토·일요일도 상관없이 진료하고 시술해야 했다. 큰물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큰물에서 놀기만 하면 대수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냐다. 이러한 생각은 그를 있는 자리에 최대한 집중하게 한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이라도 복잡하면 가지 않는다. 차라리 맛없고 한가한 곳을 골라 간다. 복잡한 것은 질색이다. 편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다. 선택한 후에는 최대한 집중할 뿐이다.

병원이 자리 잡히면 양가 부모님께 집을 한 채씩 사 드리고 온천을 좋아하는 아내의 뜻에 따라 온 가족이 함께 일본 온천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무엇보다 병원을 찾는 어르신들께 좀 더 사근사근하게 굴어야겠다. 또 해남야구단에 하루빨리 전용 구장이 생겨 초청 경기를 마음껏 하고 싶다.

“불안이든 두려움이든 매여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남이 다 가는 길을 생각 없이 따라가서는 그들만큼도 갈 수 없습니다.”

지현 씨가 들려주는 포트폴리오 인생의 비결이다. 2루를 떠나지 않으면 3루에 닿을 수 없다는….

글■송숙희 월간중앙 객원기자 / 사진■권태균 월간중앙 사진팀장(scarf94@joongang.co.kr] / photocivic@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 [J-HOT] 이 당선자 "그렇게 '입조심' 당부했건만 또… "

▶ [J-HOT] NYT "베니스 운하·뉴욕 센트럴파크 등 갖춰진 곳 송도"

▶ [J-HOT] 이명박 일대기가 관광상품?…연일 천여명 줄이어

▶ [J-HOT] 리우 해변 40℃ 불볕더위 60만 '벌떼 피서객'

▶ [J-HOT] 신동엽, 배용준 흑목발 보고 "내 생애 본것중 최고 럭셔리"

“일·가족·야구… 원하는 것은 다 갖고 싶어, 꼼꼼한 분석에 ‘運七氣三’ 더하면 럭키!” #남자는 못 말려~① 치과의사 이지현의 포트폴리오 人生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