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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 알면서도 교단에선 나서지 않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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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02면

2008 대입 수능 시험이 끝난 지난달 15일 저녁. 강사 경력 2년차의 배기범(30·사진) 메가스터디 물리 강사는 라이브로 진행되는 인터넷 해설 강의를 하기 위해 물리 Ⅱ 11번 문제를 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능 물리Ⅱ 출제 잘못, 첫 문제 제기한 강사 배기범씨

신동연 기자

“제시문에 나온 ‘이상기체’가 단원자라는 전제가 없었고요. 정답을 ④번으로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런 전제가 없다면 정답은 오히려 ②번이 맞다고 봐야 하는데….”

배씨는 오후 10시 전국으로 생방송된 강의에서 “이 문제는 잘못됐다”며 학생들에게 이의신청을 하라고 말했다. 출제 오류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것이다.

배씨는 주도면밀했다. 강의를 마친 직후인 16일 새벽 과학고 교과서까지 포함해 현행 교과서 10종과 대학 전공서적까지 뒤졌다.

“해설강의는 보통 고2 학생들이 많이 듣거든요. 정작 수험생은 이 사실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자료를 수강생 게시판에 올렸지요. 당사자인 수험생이 쉽게 이의제기를 할 수 있도록 근거자료를 만들어준 것이지요.”

평소 배씨의 강의를 듣던 서울 광남고의 진우정(18)군이 첫 번째로 평가원에 이의신청을 한 데 이어 수험생들이 19일까지 모두 10건의 이의신청을 접수시켰다. 배씨는 문제가 금방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2003년도에도 평가원이 언어영역 정답을 바로잡은 적이 있어 수정될 줄 알았던 것. 하지만 같은 달 28일 “단원자 여부는 제7차 교과과정 수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답에는 이상이 없다”는 평가원의 검토 결과를 접했다.

자료와의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교과서를 뒤져 금성출판사·교학사·중앙교육진흥연구소 등 4종의 교과서에서 단원자 이상의 기체를 언급하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과학고용 특수교과서인 ‘고급물리’ 교과서까지 따지면 모두 10종 가운데 5종, 즉 절반이 ‘다원자 분자 이상기체’를 정식 교과과정으로 다루고 있었다. 다원자가 교과과정을 벗어난다는 평가원의 답변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었다.

“평가원은 자신이 검정·심사한 교과서 절반에 들어가 있는 내용까지 무시하려고 한 겁니다. 근본적으로 출제위원과 검토위원들은 폐쇄적이에요. 대외비로 출제하고 보안을 지켜야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이의가 제기되면 외부 인사들도 참여시켜 검토를 해야 했어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가 보더군요.”

배씨는 10쪽짜리 자료를 작성해 주요 포털 게시판에 올렸다. 또 자신이 졸업한 서울대 물리교육과 석·박사 과정에 있는 현직 교사 10여 명에게 자문을 했다. 교사들은 “문제가 이상하다”고 동의하면서도 관망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교수들을 찾았지만 이들 역시 공론화하기를 꺼렸다. 배씨는 “선배 교수가 강하게 밀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게 권력 구조상 쉽지 않다는 게 교수들의 얘기였다”고 전했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수험생들을 모아 평가원을 상대로 소송하는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22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물리학회가 긴급 회의를 열어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출제돼 복수 정답이 가능하다”고 발표하고 나선 것. 서울 중동고의 이종화군이 한국물리학회에 해당 문제에 대한 검토를 요청한 것이 평가원의 철벽수비를 깨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군도 배씨의 강의를 접하고 평가원에 이의신청을 했던 수험생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평가원은 물리학회 발표에 대해 “수험생들이 배우는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고려하지 않은 물리학적 관점에서만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배씨는 “이번처럼 명백한 오류를 평가원이 감췄던 적은 없었다”며 “적당히 넘길 수 있는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비판 여론이 커지자 결국 평가원은 ‘복수정답’을 인정하고 원장 사퇴라는 카드까지 꺼내야 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수능 등급이 바뀐 수험생은 1000여 명. 배씨는 “교과과정에 따라 하나라도 더 알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라며 “정답 바로잡기에 매달렸던 것도 이런 학생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번 문제는 모의 평가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문제예요. 올해 9월 모의평가 때는 단원자라는 전제가 포함돼 있었고 지난해 6월 모의평가 때는 포함이 안 돼 있었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이런 문제가 나오면 ‘단원자’로 전제하고 풀라는 말도 했습니다. 문제 푸는 테크닉을 가르친 것이지만 물리학적으로는 정당하지 않죠. 알면서도 정답을 쓰겠다고 틀린 학생들도 적지 않습니다.”

요즘 그에겐 수능 등급이 조정된 수험생들에게서 ‘고맙다’는 문자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배씨의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다. 자칫 강사와 수험생 간의 ‘메아리’로만 머물다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정답’임을 알면서도 등을 돌렸던 얼굴들이 떠오르곤 한다고 한다.

“눈치를 보았던 것이겠지요. 교사 분들은 공적인 기관에 몸 담고 있어 문제 제기를 주저했고요. 활동이 자유로운 학원 강사들도 섣불리 나섰다 자기 이미지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책임 있는 어른들이 외면하는 사이에 오류가 있는 문제가 적당히 넘어가고, 수험생들은 더욱 겉핥기 식으로 공부할 것이란 절박함이 들었습니다.”

배씨는 “이번 정답 오류 파문을 계기로 수험생과 학부모 모두가 수긍할 수 있게끔 수능 출제와 검토, 이의제기 시스템이 재정비돼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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