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진짜 ‘경제 대통령’이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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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글 쓰는 것이 직업인 저도 한 해를 돌이켜 봅니다. 신문에 글을 쓴다는 것의 다른 의미는 신문에 난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일 겁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은 제게 때론 매서운 채찍이고, 신선한 자극이기도 합니다. 올해도 남의 글을 숱하게 읽었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글 하나를 고르라면 조선일보의 박정훈 경제부장이 쓴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 후보’란 칼럼(10월 26일자)입니다. 비록 경쟁지 기자지만 그의 글을 읽으며 내심 깨우침이 컸음을 고백합니다. 
 
박 부장은 “올해 국내 최고의 수출기업은 삼성전자가 아니라 미래에셋이다”는 도발적 화두로 글을 시작합니다. 이 회사는 올 들어 해외펀드 투자로 7조5000억원을 벌어들여 같은 기간 삼성전자가 수출로 번 영업이익 3조3000억원의 곱절 이상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휴대전화와 반도체를 수출해 돈을 버는 것이나 자본을 수출해 돈을 버는 것이나 돈 버는 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의 글은 “삼성전자가 한국경제를 먹여 살렸듯이 어떻게 금융을 통해 새로운 국부(國富)를 창출하느냐는 것은 좌우, 보수·진보와 관계없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문제”라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키워 내는 문제가 한반도 대운하나 개성공단보다 몇 배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박 부장은 글을 맺었습니다.

공모(公募)펀드에 사모(私募)펀드, 헤지펀드에 국부펀드까지 펀드가 21세기 자본주의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세계가 치열한 ‘쩐의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주식이든 채권이든 원자재든 부동산이든 가리지 않고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민간 부문의 펀드 규모가 92조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중국·싱가포르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중동국들은 넘쳐나는 무역수지 흑자와 오일 달러로 배불뚝이가 된 외환보유액으로 국부펀드를 만들어 너도나도 글로벌 머니 게임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현재 2조8000억 달러인 국부펀드 규모가 10년 뒤에는 17조5000억 달러로 커진다는 것이 모건 스탠리의 예측입니다.

펀드는 이미 우리 안방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설정액이 300조원에 달하고, 펀드 계좌 수(1922만 개)는 전체 가구 수(1641만 가구)를 넘어섰습니다. 안방에서 빠져나간 돈이 브릭스펀드, 인도펀드, 차이나펀드, 친디아펀드로 변해 세계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세상이 됐습니다. 올 들어 국내에서 활동하는 51개 자산운용사는 해외 주식형 펀드로 60조원을 끌어 모아 23.5%의 평균 수익률을 올렸습니다. 자본 수출로 14조원을 벌어들였다는 계산입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BBK 공세에 시달리면서도 완강하게 관련 의혹을 부인했습니다. BBK는 일종의 펀드회사고, 김경준씨의 본업은 펀드 매니저입니다. 금융자본주의의 총아인 펀드의 복잡한 거래 시스템을 잘 몰라 이 당선자가 그에게 당한 것이라면 ‘경제 대통령’ 자격이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그로서는 가장 신경 쓰이지 않았을까요.

생산 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경제의 한 축이라면 그렇게 번 돈을 굴려 불리는 것은 경제의 다른 한 축입니다. 산업과 금융의 양 날개로 날 수밖에 없는 것이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현실입니다.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의 해법도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속은 것이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일찌감치 펀드의 중요성을 간파했다는 뜻도 됩니다. 이 당선자는 BBK를 독이 아니라 약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산업강국이면서 동시에 금융강국이 될 때 그는 진정한 경제 대통령으로 각인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