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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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기온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높아가고 있었다.학교는 바야흐로 여름방학 준비에 돌입한 것 같았다.과목마다 기말시험에 관한 지침을 발표했고 이어 종강을 맞았다.유례없이 도서관이 붐비는 시즌이 된 거였다.
나는 희수와 둘이 한강 유람선을 경험한 사실을 소라에게 말하지 않았다.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거였다.나는 소라의노트도 빌려볼 겸 도서관에 나란히 앉고는 했는데,소라는 어느새무언가 낌새를 맡은 건지도 몰랐다.하루는 둘이 커피를 빼들고 도서관밖의 벤치에 앉았는데 문득 소라가 그랬다.
『윤찬이와 희수가 둘이서 너무 갑자기 진하게 되니까 우리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어.달수 너하고 나는 조연이 될 것 같기도하구….난 요즘에 걔네들 통 못봤네.넌 언제 봤어? 윤찬이나 희수나….』 『아니,그러구 보니까 나도 한동안 못봤네.어린애들도 아닌데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동거하는 것두 아닌데 뭐.』 『관계라는 게… 일단 깊어지면… 더 깊어지거나 멀어지거나그런 거잖아.우린 편하구 오래가구 그러는 게 좋잖아.친구로 말이야.걔네가 깨지면 우리도 다 서먹서먹해질까봐 겁나.』 그날은그런 정도로밖에 말하지 않았다.나는 대개 희수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다가 자리로 돌아가자고 그랬다.
월요일부터 기말시험이 시작되는 금요일의 늦은 아침이었다.집으로 희수의 전화가 걸려왔다.둘이서 유람선을 탔던 게 엿새 전이었다. 『시험이구 뭐구 다 답답해.바람이나 쐬고 왔으면 좋겠어.너하구.』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어쩐지 희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그러자고 했다.우리는 신촌에서 만나 2호선 전철을 타고 신도림까지 가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제물포까지 갔다.거기서 다시 안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적당히 아무데서나 내렸다.소래라는 이름의 작은 포구였다.
허름한 식당에서 백반을 먹고 나서 철길을 따라 걷기도 하였다.물이 빠진 바다의 갯벌에 폐선 몇 척과 붉게 녹슨 닻 따위가팽개쳐져 있었다.『갯벌은 옷을 벗은 여자의 속살같아』라고 내가그랬지만 희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철길을 중심으로 왼편으로소금창고가 나타났고 오른편에는 긴 방죽 너머로 갯벌이었다.방죽의 곳곳에 무슨 군인 초소같은 것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우리 형도 군대에 가 있어』라고 내가 그랬지만 희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방죽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았다.물론 바다를 향해서.희수가 지난밤에 벌어졌던 사건을 말했다.윤찬이 술냄새를 풍기고 희수의 아파트에 찾아왔고 희수를 범하려고 덤벼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주 통속적인 사연이야.어쨌든 그래서… 했어?』 『너야말로 통속적이야.멍달수 넌… 정말 저질이야.윤찬이보다 더.』 희수가 조금 훌쩍였다.나는 희수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돌아가자고 말했다.철길을 되돌아가는데 해질녘이었고,희수는 어쩐지 갑자기 십년은 더 늙어보였다.
『개갈보… 넌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알아?』 희수가 오분쯤가만히 걷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사는 게 너무 구질구질해.난사실 겨우 열아홉인데… 벌써 지겹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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