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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산타가 사라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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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26면

1. 샤이닝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신세계 백화점의 외관 장식 2. 살바도르 달리의 ‘모래시계’를 모티브로 한 하나은행의 설치물

해마다 12월이 되면 전 세계의 도시는 ‘크리스마스’라는 컨셉트로 화려하게 물든다. 올해의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뭔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다. ‘거리는 그저 내가 걸어 다니는 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생각하는 팍팍한 이들만 아니라면 분명 올 연말 도심 장식에서 빠진 게 있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다.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빙고!

3. 롯데 에비뉴엘 ‘러브&판타지’ 전 전시 가운데

그 이유를 유럽의 ‘안티 산타 운동’ 때문으로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체코와 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확산된 ‘안티 산타 운동’의 핵심은 ‘산타는 크리스마스가 상업화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1920년대 당시 겨울철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코카콜라사가 자신들의 고유한 상표를 연상케 하는 흰 수염과 빨간 옷의 산타를 광고에 등장시켰고, 이후 47년 개봉한 ‘34번가의 기적’ 등의 영화들을 통해 그 모습이 반복되면서 현재의 산타로 각인됐다는 주장이다. 결국 ‘안티 산타 운동’은 산타 본래의 성스러운 이미지(어린이들에게 선행을 베푸는)를 훼손시키는 상업적인 산타, 덧붙이면 코카콜라로 대표되는 미국식 상술을 거부한다는 운동이다.

산타클로스가 설 자리를 잃은 이유로는 ‘비만에 대한 경계’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산타클로스가 너무 뚱뚱하다는 비판이 일면서, 웰빙에 반하는 산타가 매력을 상실했다는 주장이다.우리에게 ‘안티 산타 운동’은 그저 해외 토픽 내지는 해외 단신 정도로 소개될 뿐 화두는 아니다. 어차피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의 탄생일’이라는 종교적인 개념보다 머리맡에 양말을 두고 자면 선물이 가득한 아침을 맞게 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는 날이다.

이제 본론을 말하자면 한국의 크리스마스, 연말 치장이 달라졌다. 패션에도 트렌드가 있듯 크리스마스 장식에도 유행이 생겼다. 산타와 루돌프가 사라졌고, 무엇보다 초록색과 빨강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컬러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큰 변화다. 자연스레 초록색 전나무 장식과 빨간 리본 장식도 보이지 않는다.

4. 이글루와 북극곰이 테마인 갤러리아 백화점 본점 5. 천장 조명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살린 신라 호텔 로비 6. 사람 크기만 한 호두까기 인형을 세운 현대 백화점 본점

어떻게 변했을까? 거리의 연말 장식 비주얼은 대부분 길목마다 랜드마크가 되는 대기업의 건물들이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으로 확인돼 왔다. 그런데 올해는 바로 그 대기업의 ‘크리스마스 드레스’가 모던하고 세련된 ‘아트’를 지향하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도 가장 화려함을 뽐내는 신세계와 롯데 두 백화점의 경우 화이트를 컨셉트 컬러로 잡았다.

10월 31일 3개월의 작업 끝에 점등식을 한 신세계 백화점의 외관은 건물 전체가 작은 눈송이로 덮인 듯하다. 주제는 ‘샤이닝 크리스마스’. 프랑스 리옹 성당의 외관 조명을 샘플링한 것으로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해 온 아이스화이트 색상의 LED 조명 30만 개가 사용됐다. 이 전구는 기본적으로는 화이트지만 색온도를 5000~6000K(섭씨 4727~5727도)로 높이면 푸른빛이 도는 특징이 있다.

30만 개의 조명을 5시간 밝히는 데 드는 전기료가 불과 3만원이라는 것도 장점이다. 함께 장식한 백화점 앞 로터리의 분수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 같아 인기가 좋다.

롯데 백화점도 본관 외벽을 눈 모양의 조형물과 화이트 조명을 이용해 은은하고 깔끔하게 연출했다. 흥미로운 것은 롯데 에비뉴엘이다. 개관 때부터 꾸준히 아트 전시회를 기획해 온 에비뉴엘은 외관을 꾸미기보다 ‘러브&판타지(love & fantasy)’라는 이름의 낭만적인 전시로 실내로 들어온 고객에게 현대아트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신비롭고 매력적인 크리스마스로의 여행을 인도한다.

공간과 어우러지는 조명 설치물을 통해 크리스마스 실내 장식을 한 신라 호텔의 경우도 눈에 띈다. 로비 천장에 설치한 ‘조합체, An Aggregate 07-063’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건축적인 형태의 설치조각 예술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 박기선이 작업한 것이다. 수만 개의 투명 아크릴 비즈를 나일론 줄에 매달아 늘어뜨린 다이아몬드 형태의 이 구조물은 ‘반짝이는 수많은 개체가 공간과 호흡하며 기분 좋은 설렘을 만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필요에 의해 들어선 친숙한 실내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예술 작품을 만나면서 잠시나마 ‘상상’의 공간으로서 생각을 전환시킨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기존 생각의 틀을 깨고 초현실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은행 을지로 본점의 ‘아트 빌딩’으로의 시도는 정말 신선하다. 건물 전체를 하나은행의 CI 컬러인 녹색과 검정의 시트지로 감싼, 이 국내 최대 설치미술품의 주제는 ‘콘크리트 시계’다. “콘크리트 건물을 뜨겁게 달구어 녹여내는 모래시계를 통해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고자 한 것”이 작가 고우석의 설명이다.

산타클로스·트리 등의 일반적인 크리스마스 소재에서 벗어나 추억 속의 동화, 겨울 시즌에 맞는 테마 등으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예들은 현대 백화점의 ‘호두까기 인형’과 갤러리아 백화점의 ‘이글루와 북극곰’ 조형물에서도 볼 수 있다.

해마다 연말 크리스마스 장식이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것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숙한 규칙을 강요받던 기숙사생들이 12월 한 달만큼은 자유롭게 치장하고 마음껏 뭇 시선을 유혹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대기업 디스플레이어들이 생각의 틀을 넓히고 창작의 의욕까지 욕심 낸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는 서글픈 ‘시간의 선’을 이렇게라도 즐겁게 넘을 수 있다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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