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공화당 경선 ‘가족’은 어디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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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 공화당의 성향은 보수주의다. 공화당원들이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건 '가족 가치(family values)'다. 1992년 공화당 소속 댄 퀘일 당시 부통령은 TV 프로그램의 미혼모 캐릭터인 머피 브라운에 대해 "아버지를 경시하는 등 가족의 핵심 가치를 조롱했다"고 질타했다. 퀘일 부통령은 TV 속 허구의 인물에 대해서까지 가족 가치를 지키라고 요구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머피는 TV 프로그램에서 "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다양한 형태의 가족은 인정해야 한다"고 꼬집었으나 퀘일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공화당은 2004년 대선 때 낙태와 동성애에 대해 유권자들이 찬성하는지 여러 주에서 주민투표에 부쳤다. 낙태와 동성애를 반대하는 공화당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그런 전략을 썼다. '부시의 두뇌'라는 별명을 지난 칼 로브 전 백악관 부실장이 고안한 이 수법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선에 보탬이 됐다.

그런 공화당이 이젠 달라졌다. 당내 대선 경쟁이 한창이지만 '가족 가치'란 말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걸 강조하는 사람은 선두권의 대선 주자 중 모르몬교 신자인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유일하다. 롬니는 "우리의 미래는 가정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자녀보다 순서가 먼저인 것은 결혼"이라며 미혼의 불장난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선거유세를 할 때 부인과 다섯 명의 아들을 종종 대동한다.

반면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존 매케인 상원의원, 프레드 톰슨 전 상원의원,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는 '가족'이란 말을 거의 꺼내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USA투데이는 최근 "줄리아니는 두 번, 매케인과 톰슨은 한 번 이혼한 적이 있다"며 "그들에겐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이 없기 때문에 가족 가치를 잘 얘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문은 또 줄리아니나 매케인이 낙태와 동성애를 인정하는 등 진보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보도했다.

침례교 목사 출신인 허커비는 롬니 못지 않게 보수적이지만 그의 입에서도 가족 얘기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는 건 자신이 기독교 지도자라는 점이다.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지지 덕분에 '허커비 돌풍'이 일어난 만큼 하나의 명료한 메시지만으로 그들의 지지를 강화하겠다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가족 가치'가 푸대접을 받게 된 건 미국 사회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USA투데이는 "대선 주자나 국민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테러,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경제 등과 같은 보다 화급한 이슈를 더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혼이나 동성애가 과거보다 더 보편화된 것도 국민의 인식에 변화를 줬다"고 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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