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서른 살 … 골프·사랑 두 토끼 잡을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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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열린 한·일 여자골프 대항전에서 ‘메이저 퀸’ 박지은(나이키골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렉서스컵(아시아-인터내셔널 여자골프대항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세리·김미현과 함께 ‘빅3’로 꼽혔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대뜸 “할 말이 아주 많다”고 했다. 지난 16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박지은과 마주 앉았다.

“슬럼프라는 말로는 모자라지요. 정말 최악의 한 해를 보냈어요. 이제 더 이상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곳이 없다는 말이 맞겠지요.”

박지은은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올해 LPGA투어에서 박지은의 상금랭킹은 87위. 15차례 대회에 출전했지만 우승은커녕 톱10에 든 적도 없었다. 드라이브샷은 들쭉날쭉했고, 아이언샷도 엉망이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박지은은 척 보기에도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정장까지 차려입으니 골프선수라기보다는 이제 막 사무실에서 퇴근한 전문직 여성처럼 보였다.

“골프보다 외모에만 신경 썼냐고요? 그런 비난을 받을 만도 하지요. 다이어트를 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마음고생을 하니까 살이 저절로 빠지던걸요. 평소 몸무게가 56㎏ 정도였는데 한때 51㎏까지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한때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과 1위 자리를 다투다 갑자기 최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친 이유가 뭘까.

“연습을 게을리 한 거 인정해요. 아니, 연습 시간이 적은 건 아니었는데 전혀 집중하지 못했던 거죠. 개인적인 문제로 건성건성 훈련을 했고, 골프에 대한 회의도 들었어요. 명교습가인 부치 하먼에게 배우다가 스윙이 바뀌면서 오히려 샷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졌고요.”

박지은은 “원래 페이드샷 구질이었는데 하먼의 지도를 받고 난 뒤엔 예상하지 않았던 드로성 구질이 나와 무척 당황했다”고 털어놨다. 개인적인 문제란 도대체 뭐냐고 캐물었다.

“잘 아시잖아요. 모두들 남자 친구를 사귀느라 연습을 게을리 해 성적이 떨어졌다고 수군거리던걸요. 말이 부풀려져 속상할 때도 많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네 살 많은 남자 친구와 7년째 사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남자 친구가 있으면 성적이 나빠진다는 공식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저도 이제 내년이면 서른이에요. 개인적인 생활도 갖고 싶어요.”

박지은은 “2008년엔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다”고 강조했다. 손에 든 커피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비장한 어조였다.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그동안 말만 앞섰지 프로 데뷔 이후 단 한번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요. 2004년 2승을 거둔 이후엔 골프에 싫증을 느끼기까지 했고요.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요. 얼마 전 골프장에서 화장실에 갔는데 바깥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어요. ‘공도 못 치는 게 나이 든 남자들과 어울려 다닌다’고요. 그날 제가 함께 라운드했던 분들은 후원사 임원이었거든요.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정작 무서워 화장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얼굴만 반반하면 다냐, 공도 못 치는 게’하는 식의 글이 많이 올라와요.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 결심했어요. 내년 일 년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각오로 공을 치겠다고요. 이 지긋지긋한 슬럼프에서 꼭 벗어나고야 말 거예요.”

올 10월 입국한 뒤 휴식을 취했던 박지은은 서둘러 샷을 가다듬기 위해 크리스마스 휴가도 반납하고 이번 주말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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