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선택 못 받았지만 … 죄송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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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일 오후 9시20분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서울 당산동 당사 브리핑실에 들어섰다. 패배 승복 기자회견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죄송하다. 제가 부족해서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준비해온 메모를 읽었다.

그는 "비록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 국민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겠다"고 강조했다. 그의 뒤로는 오충일 대표와 정대철.손학규.이해찬.한명숙.추미애 선대위원장, 김원기 전 국회의장, 이용희 의원 등이 섰다.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문 채 굳은 표정이었다.

정 후보는 이날 오전 투표를 마친 뒤 태안 기름 유출 현장 복구 지원에 나섰다. 이후 패배를 예감한 듯 오후 6시부터 당사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려던 계획을 바꿔 저녁 기자회견으로 대신했다. 당사 바깥에선 100여 명의 지지자가 떠나는 그에게 "힘내세요" "정동영 파이팅"을 외쳤다. 그러나 직후 신당 당사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소속 의원 141명의 신당 당사엔 지지자도 의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앞서 두 시간여 전인 오후 6시 초조하게 6층 회의실에 앉아 있던 오 대표 등 당지도부와 의원 50여 명은 방송 출구조사 결과가 '더블 스코어 차이'의 패배로 발표되자 입을 열지 못했다. 15분 만에 정대철 선대위원장이 "저녁식사라도 하고 옵시다"라며 어색하게 일어섰고 다른 지도부도 일제히 함께 자리를 빠져나갔다.

신당에선 충격을 넘어 공황에 가까운 위기감도 튀어나온다. 이낙연 대변인은 "무겁다.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참여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정말 컸다"며 "근본적 변화 없이는 대선 패배로 끝나는 게 아니라 대안 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대선 3수'에 실패한 이회창 무소속 후보는 오후 8시20분쯤 서울 남대문 단암빌딩 캠프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투표함이 20%도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명박 당선자에게 축하 말씀을 전한다"고 패배를 담담히 인정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요행수를 바라고 선거에만 이기자고 나온 건 아니다"며 "결과와 상관없이 국민에게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지켜 가야 할 원칙과 가치를 꼭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저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며 "떨어져 죽은 하나의 씨앗이 꽃을 피우고 무성한 열매를 맺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 신당 창당에 대한 강한 집념도 내비쳤다.

캠프는 침울했다. 오후 6시 캠프 상황실에서 방송사 출구조사와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심대평 선대위원장.강삼재 전략기획팀장.이흥주 홍보팀장 등은 10여 분간 입을 열지 못했다. 이회창 후보의 '정계 은퇴' 시절을 함께한 이흥주 팀장은 한쪽 벽에 기대 흐느끼기도 했다.

일부 지지자는 "캠프는 도대체 뭘 한 거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개표 방송을 지켜보던 캠프 관계자들은 이 후보가 선거비용 보전 마지노선인 득표율 15%대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자 손에 땀을 쥐기도 했다.

당혹한 것은 민주노동당도 마찬가지다. 권영길 후보는 서울 문래동 당사에서 "민주노동당은 미래에 대한 투자를 국민에 호소했다"고 말한 뒤 당사를 떠났다. 민노당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10%에 육박하는 지지율만 만들면 진보 정당의 입지를 굳혀 내년 4월 총선에서 입지를 확대한다는 기대가 사라졌다. 한 인사는 "보수 정권의 득세가 대표 진보정당인 민노당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우려했다. 민노당 일각에선 저조한 득표율을 놓고 최고위원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글=채병건.정강현.김경진 기자 , 사진=조용철.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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