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崔대표, 이회창 탓만 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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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나라당이 겪고 있는 위기의 원인이 불법 대선자금 탓이라며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씨의 책임론을 제기한 최병렬 대표의 상황인식은 문제가 있다.

崔대표는 어제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며 李씨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는 당 지도자의 희생적 결단을 요구하는 현재의 상황을 외면하고 핵심을 비켜나가려는 얄팍한 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불법 대선자금 모금이 어째서 이회창씨 한 사람의 책임인가. 그를 후보로 선출해 당선시키려 했던 한나라당 조직과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다.

더구나 崔대표는 그 때 선거대책위 공동의장을 맡았었다. 운명공동체 관계에서 사정이 다급해지니 후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은 빠지겠다는 것은 정치 지도자의 온당한 태도가 아니고 정치 도의에도 맞지 않다. 만일 이회창씨가 대선에 당선됐다면 그 때도 李씨의 책임이라고 했을까 의문이다.

崔대표는 거대 야당을 책임지는 수장이다. 당 지지율보다 대표의 지지율이 낮은 현재의 당 사정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먼저 매를 맞겠다는 자세가 필요했다. 이는 대선자금 파문 이후 표면화된 한나라당의 위기상황에 대해 쏟아진 고언(苦言)들 가운데 과거의 후보에 대한 비판보다 현재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가 월등히 많은 데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의 위기가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정체성을 잃은 데서 비롯됐다는 충고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회창씨의 태도도 문제다. 그는 지난해 말 불법자금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고 감옥에 가도 자신이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불법자금의 규모가 불어나 7백억원을 넘어섰고, 당 관계자와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는데도 줄곧 침묵의 장막 뒤에 숨어 있다. 수하들의 감옥행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고 있을 일이 아니라 이제라도 사실관계를 상세히 파악하고 정리한 뒤 자신이 책임질 부분을 분명히 밝히고 그에 상응하는 속죄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이회창씨가 할 일이다. 그것이 자신을 대선 후보로 내보낸 당과 표를 찍어준 1천1백40만여명의 유권자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않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