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외과의사 3代’ 가족의 외과醫 예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호 12면

의료계에서 보기 드물게 3대째 외과 의사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한원곤 강북삼성병원장(오른쪽)과 아버지 한희철(가운데) 옹, 아들 윤대씨가 지난 4월 모교인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모였다. [강북삼성병원 제공]

한원곤 원장 가족은 같은 대학(연세대 의대), 같은 교실(외과학)을 나온 보기 드문 이력을 갖고 있다. 한 원장이 세브란스 출신의 칼잡이(외과의사) 모임인 ‘세도회’의 이사, 부친 한옹은 고문, 윤대씨는 준회원(전문의가 되면 정식 회원)이다. 그만큼 외과의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죽음과 싸워 목숨 구하는 화려한 칼잡이”

“외과의사는 인간의 생과 사를 직관(直觀)하는 화려한 직업입니다. 이만큼 화려한 데가 없습니다.”

뉴욕의 딸 집을 방문 중인 한희철옹은 전화기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과 예찬론을 폈다. 한옹은 “너무 멋있어서 외과의사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한 원장과 윤대씨에게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한 원장은 “1970년대 후반에는 서로 외과의사를 하려 했다”면서 “아버지가 (외과를) 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외과를 지망했더니 좋아하셨다”고 회고한다.

외과 기피 현상의 중심에 있던 윤대씨의 선택 배경이 가장 궁금했다.

“어릴 때 응급 수술하러 새벽에 나가는 아버지가 멋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런 삶이 무의식 속에 있다가 외과를 선택하는 불빛이 된 거죠. 나머지 과는 ‘샛길’이었습니다. 제3차 세계대전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람 목숨을 살리는 최종적인 길은 수술이고, 그래서 외과를 선택했습니다.”

한옹과 한 원장은 윤대씨의 선택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한옹은 “아들(한 원장)이 나를 따라서 하니까 손자도 따라 한 것이다. 이왕이면 같이 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방향이 잡혔다”고 말한다. 한 원장은 윤대씨의 선택에 대해 “일본은 떡집을 3대가 이어서 한다는데 (윤대가) 가업을 이어 자긍심을 느낀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윤대씨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는다. 3월 초 오후 4시쯤 독립문 인근 금화터널에서 정면 충돌 사고를 당한 택시기사가 배가 퉁퉁 부어 실려 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혈액량이 절반밖에 안 됐다. 교수, 전공의 선배 두 명과 함께 수술에 들어갔다. 원인을 모르니 일단 배를 열어야 했다. 혈관 전문의가 와서 찢어진 정맥을 꿰맸다. 선배 레지던트와 윤대씨는 4~5m 되는 십이지장과 대장을 10㎝ 간격으로 훑으며 다친 데를 자르고 꿰맸다. 새벽 1시에 수술이 끝났다. 저녁을 먹을 생각도 못했다. 그 환자는 한 달 뒤 완치돼 퇴원했다. 윤대씨는 수술 당시 상황을 “흥미진진했다”면서 “외과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원장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87년 금화터널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를 떠올린다. 장·혈관이 찢어지고 횡격막이 터져 숨지기 직전이었는데 다섯 차례 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환자는 당시 환자 부인의 배 속에서 자라던 아이를 데리고 매년 명절에 찾아온다고 한다.

외과 기피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수술 수가(비용)가 너무 낮고 외과의사를 사장시키는 환경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의사·전문간호사 등 10여 명이 붙어 5~10시간 수술하면 100만~200만원이 나온다. 쌍꺼풀 수술비도 안 된다.

“외과를 살리려면 외국처럼 개방형 병원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개업한 외과 의사가
자기 환자를 큰 병원에서 수술하고 입원시키는 것이죠. 그러려면 적정 수술비가 보장돼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술할 시간에 감기환자 20~30명을 보는 게 더 나아요. 그러니 외과의사의 전문성을 쓸 데가 없는 것이지요.”(한 원장)

한 원장은 “그렇다고 외과 수술비만 올릴 수 없기 때문에 한정된 파이(건강보험 재정)를 새로 분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의 행위가 적게 들어가는 의료 항목의 수가를 낮춰 수술 쪽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 원장은 “의사 사회가 이를 조정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 중장기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의사 업무량이 많은 행위는 수가가 당연히 높고 그렇기 때문에 우수한 사람이 몰린다는 게 한 원장의 설명이다. 또 국공립병원 20여 곳에만 지원하는 전공의 수련보조수당을 민간병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대씨는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을 시작할 때는 외과 기피 현상이 별로 없다가 끝날 때가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외과의사를 생각한 사람도 ‘새벽까지 힘들게 일하고 실수하면 소송 걸리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를 가고 그중 성적 좋은 사람은 피부과나 성형외과로 가는데 이는 국가적 낭비입니다. 최고 엘리트가 개업해서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 피부 진료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5~10년 뒤 수술할 의사가 부족할 테고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갑니다.”(한 원장)

한옹은 젊은 의사들의 영악함을 꾸짖었다. “어렵다고 해서, 대우가 나쁘다고 해서 (외과를) 안 한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의사는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중요합니다. 의사는 보수를 따져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얼굴에 주름을 펴주는 게 의학이 아니에요. 목숨을 다루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한원곤 원장 가족= 한희철옹은 1943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외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세브란스병원 외과학교실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 61년 춘천에서 ‘한외과’(나중에 춘천제일병원이 됨)를 개업했다. 당시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위암 수술을 했을 정도로 알아주는 외과의사였다. 강원도 의사회장을 오래 지냈다.

한원곤 원장은 대장암 등 소화기 암 수술의 권위자이다. 85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의사 생활을 시작해 2004년 강북삼성병원 원장에 올랐고 지난해 연임했다. 대장항문학회 차기 회장에 내정돼 있다.

한윤대씨는 올해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할아버지 병원에서 메스를 잡고 수술 흉내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윤대씨의 여동생 소영씨는 이화여대 의대 본과 4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한 원장은 “딸아이가 외과에 관심을 보여 걱정”이라며 “여자에겐 힘든 분야”라고 말한다.

■ 외과= 배나 유방, 갑상선이나 혈관, 장기이식 수술을 한다. 위·대장·유방·췌장·담도암 수술이 대표적이다. 심장·폐는 흉부외과가 담당한다. 외과에서 흉부·정형·신경·성형외과가 떨어져 나갔다. 10월 말 현재 외과 의사는 4476명, 이 중 29%가 수술을 하는 큰 병원에서 근무하고 절반 이상이 수술을 포기하고 동네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