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은 오락으로 봐주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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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11면

‘띠링-’ 정적을 깨는 문자 알림음. 무거운 마음으로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닐슨/TNS 해피 16.7/17.7 일밤 13.9/14.8 일요일 8.9/8.5.’ 살았다. 우리가 이겼다.

현장을 뛴다-고민구(KBS PD)

암호 같은 문자는 전날 방송된 ‘해피선데이’와 동시간대 타 방송사 프로그램의 시청률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 9시, PD와 작가들에겐 한 주의 성적표가 날아온다. 승자는 한 프로그램뿐. 상황이 심각할 땐 메인 PD가 CP(책임 PD)에게 불려 가거나 대책회의가 소집된다. 분당 시청률까지 일일이 따지니 세 코너로 구성되는 ‘해피선데이’ 같은 경우는 어느 코너가 시청률에 기여하고, 어느 코너가 그걸 까먹었는지에도 민감하다.

시청률이 저조한 날은 아이디어 회의도 늘어진다.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작가 다섯 명과 PD 세 명이 머리를 굴린다. 여자 연예인 다섯 명의 직업 체험을 보여주는 ‘하이파이브’는 요즘 오락프로그램의 전형적 포맷이다. 아이템이 경쟁 프로와 겹치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요, 출연자 스케줄과 장소 섭외 등 현실적 제약도 고려해야 한다. 게임과 벌칙 등 세세한 구성을 결정하기까지 거의 12시간 마라톤을 달린다.

회의가 잘 풀린다 해도 실전은 치러 봐야 안다. 정말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정작 촬영 땐 밋밋하기도 하고, 별 기대를 안 하다가 대박이 터지는 날도 있다. ‘미국 치어리더 편’ 땐 화려한 액션이 볼거리겠다 싶었는데 생각지 않은 ‘문화의 차이’가 있었다. ‘뿅망치로 머리 때리기’ 벌칙을 참지 못한 미국 출연자 한 명이 촬영 도중 나가 버렸다. 여차저차 촬영은 끝냈지만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반면 ‘경찰 체험편’ 땐 공무원들 상대라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절대 웃지 않는 의경’ 덕분에 물 흐르듯 진행됐다.

본격 게임은 촬영 이후다. 사실 예능 PD는 그다지 ‘현장을 뛰진’ 않는다. 일주일의 절반 이상은 편집 작업이다. 10시간 동안 녹화한 테이프를 100여 개 쌓아놓고 가장 재미있고 좋은 ‘그림’을 뽑아내는 일, 거기에 더 박장대소할 자막을 붙이는 일이 예능 PD의 진정한 과제다.

출연자들도 사람인지라 녹화 내내 웃길 순 없다. 원본을 보며 ‘재미의 정수’만을 골라야 한다.

‘하이파이브’ 같은 경우엔 다섯 명의 출연자를 고르게 안배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요즘은 자막도 트렌드에 맞춰 줘야 한다. 춤추는 여자 출연자가 나오는 화면에서 내내 ‘섹시~’만 연발할 순 없지 않은가. 새로운 말을 찾아내는 ‘창조의 고통’이다. 그래서 ‘**작렬’ ‘이 죽일 놈의~’ 등 같은 자막 유행어도 종종 생겨난다.

그렇게 산고를 겪고 ‘시사회’가 열린다. ‘재미있느냐 안 재미있느냐’라는 결코 논리적일 수 없는 문제를 판단하는 것도 어렵지만 요즘엔 “이거 나가도 괜찮을까”라는 식의 내부 검열이 많다.

한마디 한 장면이 설왕설래되는 인터넷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탓이다. “어디 한번 웃겨 볼래”라고 팔짱 끼고 보는 시청자, 시사 교양적 시각으로 똘똘 뭉친 시청자가 예능 PD에겐 가장 무섭다. 지면을 빌려 읍소하노니, 제발 오락은 오락으로만 봐주세요.


고민구씨는 KBS 예능국 PD로 ‘연예가중계’ ‘열려라 동요세상’ ‘해피투게더’ 등을 담당했으며 현재 2TV ‘해피선데이- 하이파이브’ 조연출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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