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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4김회담>2.<해설>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비망록 내용의 대부분이 지금까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다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들이다.
1948년 3월25일밤 평양방송을 통해 4월14일 평양에서「남북 정치협상」을 개최한다고 발표한 평양주둔 소군정(蘇軍政)과북한지도부는 남한의 좌익세력등을 통해 미군정(美軍政)과 남한의정세를 면밀히 파악해가면서 김구(金九)와 김규 식(金奎植)의 입북 지연 대처방안등 남북정치협상에 대한 전략을 짜나가고 있음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른 참석자들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한 백남운(白南雲)근로인민당 부위원장은 소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와 북조선인민위원장 김일성(金日成).북로당위원장 김두봉(金枓奉)등을 만나 남한의 정세와 김구.김규식의 입북동향과 회의 참석 목적등을 소상히 전달,소군정의 남북 정치협상에 대한 전략 구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서울에 있으면서 소군정및 북조선공산당8지도부와 은밀히 남한의 좌.우익및 미군정 동향등 정세보고와 한반도의 소비예트화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까지 했음을 시사하는 대목들이 두 김과의 회담 외에도 비망록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공을 인정받아서인지 그는 북한의 초대 교육상을 지내는등 말년까지 북한에서 요직을 지내기도 했다.
소군정과 북한지도부는 회의를 여러차례 연기해가면서도 김구와 김규식의 입북을 기다리면서 이들 두지도자를 기여코 참석시키려는의지가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두 지도자의 입북과 회의 참석을 관철시키기 위해 김구에게 언론.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참석자들에게 비용까지 지원할것을 결정했다.
소군정의 이같은 의도는 두 지도자가 법통을 갖고 있는 임정(臨政)의 대표이자 당시 남한의 대표적 정치지도자였기 때문에 소련의「민주기지」인 북한정권수립의 정통성과 두 지도자의 상징성을감안한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북한의 두 김씨가 남한의 두 지도자에게 직위를 주고 헌법 채택이후 범민족 정부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회유한 것 등도같은 의도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소군정(레베데프)은 김구가 남한의 단독선거를막는데 과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도가 어느 정도인지 등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모스크바=金局厚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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