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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M&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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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한데 합친 서울은행과 한국신탁은행은 그야말로 ‘한 지붕 두 가족’이었다. 1976년 서울신탁은행이란 상호로 이름을 뒤섞고 사무실을 합쳤지만 ‘서울’과 ‘신탁’은 여전히 물과 기름이었다. 인사발령·노조활동 따로고 점심도 끼리끼리 했다. 제3의 낙하산 은행장일 경우엔 비서실장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요직이 왔다갔다 했다. 인원 조정이 자유롭지 못하니 하는 일 없이 빨간 펜 들고 설치는 간부가 늘었다. 돌이켜 보면 서울은행(95년 개명)이 97년 외환위기로 수렁에 빠지기 전까지 이런 식으로 20년 가까이 버텼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기업 간 인수합병(M&A) 논의에서 ‘대등 합병’의 폐해를 들먹일 때 흔히 등장하는 서울은행 사례다. M&A와 경영혁신으로 미국 GE를 세계 최강 기업으로 키운 잭 웰치는 ‘피해야 할 M&A 7대 함정’ 가운데 ‘체급이 비슷한 기업끼리의 합병’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누가 옳든 발언권이 비슷하면 사공이 둘이어서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는 경고다. 98년 ‘세기의 국제결혼’이란 찬사를 받으며 성사된 다임러벤츠와 크라이슬러의 짝짓기가 올 초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파경을 맞은 것도 같은 이유로 풀이된다.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 독일식 원칙주의와 미국식 분방함이 제대로 융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대등 합병의 후유증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있었다. 유화업체 여천NCC의 절반 경영주인 대림산업이 공동 운영자인 한화의 최고 경영진을 고소까지 한 것이다. 동업자 간의 해묵은 감정 대립이 사소한 시비로 터져 버렸다. 여천NCC도 서울은행처럼 요직과 승진자를 한화와 대림이 반반씩 나누는 희한한 인사 구도를 8년째 이어 왔다. 이쯤 되면 화학적 결합이라는 M&A의 본령은 온데간데 없고 물리적 결합조차 버거운 처지다.

M&A는 ‘기업 최후의 전쟁’이라고 한다. 성공 확률이 절반도 되지 않지만 진취적인 성장 기업들은 목을 맨다. 5조원 규모의 대형 글로벌 M&A를 성사시킨 두산처럼 M&A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자세도 달라졌다. 시스코의 존 챔버스 회장은 “큰 기업이 아니라 빠른 기업이 이기는 시대”라고 했다. 빠른 것에는 물론 신속 정확한 M&A 의사결정이 포함된다.

어찌 기업뿐이겠는가. 투표일을 불과 2주일 앞둔 대선 주자들 간에도 M&A의 큰 장이 섰다. 시너지 효과를 거둘 최선의 짝짓기 선택은 무엇인지, 바쁜 후보를 대신해 참모들이라도 M&A 지침서 한 권쯤 읽어 보면 어떨까.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