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양가 상견례의 ‘찜찜한 추억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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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결혼과 관련해 가장 껄끄러웠던 기억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다수의 부부들이 양가 상견례를 꼽는다. ‘여기부터 밀리면 끝장’이라는 동물적 본능을 바탕으로 양가 부모들이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는 자리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은 웃지 못할 상견례 풍경 중 하나. 공학박사 출신 아들과 성악을 전공한 딸을 각기 데리고 나온 어머니들이 인사를 나누자마자 총탄 없는 전쟁을 시작했단다.

“우리 아들 박사 학위 받느라 그동안 들인 돈이 얼마인지 몰라요.” “한국에서 성악 공부 시키려면 웬만큼 뒷바라지 해선 안 되더군요.” 입씨름 끝에 이래서는 도저히 상대방의 기를 꺾어놓기 힘들겠다고 판단한 신랑 어머니가 급기야는 구체적인 액수를 들먹였다.

“박사 마칠 때까지 이래저래 쓴 돈이 1억원이 넘었더라니깐요.” 신부 어머니도 질세라 맞받아쳤다. “저희는 그것보다 훨씬 더 썼어요.” 투자 액수에 따라 신랑주(株)와 신부주(株)의 우열이 정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날 양가 어머니들은 “내 새끼가 더 금(金)쪽 같다”며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부부 또는 양가 중 누가 먼저 주도권을 낚아채느냐를 둘러싼 관심은 전방위에 걸쳐 있다. 예단·혼수·함의 내용물, 결혼 날짜 정하기, 신혼여행지 정하기 등 결혼 전 준비과정은 물론 신혼여행지에 도착한 날 누구네 집에 먼저 전화를 하느냐, 결혼 뒤 가정경제 관리권을 누가 쥐느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본능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매사에 이기는 게 유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은 남녀가, 양쪽 가문이 팽팽한 긴장 속에 공을 주고 받는 탁구 시합과는 좀 다르다. 오늘날 우리의 결혼이 이렇게 복잡하고 골치 아파진 건 바로 주도권 다툼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은 아닐까.

이는 결혼에 제3자가 불필요하게 개입할 여지를 남기는 동시에 두 당사자가 결혼의 ‘실질’보다 ‘외연’에 신경 쓰는 태도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사실 누구네 집에 먼저 전화를 하면 어떻고 안 하면 어떤가. 가정경제는 경제감각이 상대적으로 좀 더 뛰어난 쪽에서 맡으면 될 일이다. 이에 비하면 치약을 바닥부터 짤지, 중간부터 짤지를 놓고 부부싸움을 하는 게 차라리 덜 유치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남동생 결혼을 앞두고 이달 중순 K씨네가 치른 산뜻한 상견례 사례를 소개한다. K씨의 남동생 커플은 상견례 날 아침 단정한 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뒤, 이를 붙여 ‘상견례 순서지’를 만들었다. 참석한 부모, 형제와 그 배우자, 조카 등 가족들의 이름과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결혼식 날짜와 장소와 시간, 신혼여행 일정 등을 적어 넣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순서지에 적힌 가족정보를 서로 확인하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 첫 만남의 어색한 분위기가 서서히 풀리더란다. ‘처음에 밀리면 평생 밀린다’는 기선 제압의 욕심이 조금이라도 끼어들었다면 불가능했을 자리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상대라면 첫 단추부터 화기애애하게 끼우면 어떨까. 양가가 원하는 건 결국 두 당사자의 진정한 행복일 테니 말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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