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의 역사 칼럼] 어머니·아내보다 딸로 산 신사임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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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27면

아무래도 신사임당(1504~51) 얘기를 한 번 더 해야겠다. 며칠 전 신사임당이 5만원권 화폐 도안의 인물로 선정됨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에 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정쩡해하고 있었다. 이 ‘어정쩡함’은 어쩌면 당연하다. 40년간 들어온 얘기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1969년 주부클럽연합회(현 대한주부클럽연합회)는 ‘신사임당 상’을 만들 때 다음과
같이 그 취지를 밝히고 있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로서 여성의 올바른 사회활동을 모토로 하고 있는 주부클럽연합회의 숭고한 이념을 뜻 깊게 하기 위하여 오는 5월 17일 신사임당 탄생 ○○주년을 맞이하여 제○회 시상식을 갖고자 한다. ‘신사임당 상’은 현명한 아내로, 훌륭한 어머니로서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되며 조국 발전에 이바지할 참된 일꾼 배출에 밑거름이 될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신사임당 현모양처론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공표되고 독립된 상이 주어지는 것은 그 의미가 작지 않았다. 더구나 시대는 정말 현실적으로 ‘참된 일꾼’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따져보지 않고 신사임당이 그저 현모양처이려니 여겼다. 그것을 따져 보기에 그들은 ‘참된 일꾼’으로서 너무 바빴다.

사실 신사임당에 대해서는 학문적 연구가 별로 없다. 시조시인 이은상이 지은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 발간된 정도다. 워낙 사임당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가 없고, 또 그녀가 일찍부터 영웅류에 속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사임당=현모양처’를 더 거칠 것이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므로 토를 달 수 없었다. 이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의 상황이다.

‘신사임당 다시 보기’는 미술사 쪽에서 시작됐다.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 주자학의 대가인 송시열(1607~89)이 사임당 그림을 그 자체로 평가하기보다 뭔가 ‘율곡의 어머니’라는 점과 연관지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냈다. 현모양처론은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의구심이 비로소 생겨났다. 현모양처 이미지 때문에 신사임당이 화가로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면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곧 일반 역사 쪽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신사임당은 결혼해서 18년간 친정인 강릉이나 그 주변에 거주했다. 남편 이원수는 서울과 강릉을 오갔다. 이것은 당시 일반적인 혼인형태였다. 그러니까 신사임당은 38년간 강릉에 살았고, 서울에서는 10년 남짓 머물렀을 뿐이다. 그녀는 아내와 며느리로보다는 딸로서 훨씬 더 오래 살았다. 현모양처는 시댁에 살면서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을 잘 키운다는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러나 ‘항상 강릉을 그리워하고 밤중에 사람 기척이 없으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어떤 때는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임당은 그 자신의 정체성이 딸에 있었다.

자식 교육 문제도 그렇다. 율곡은 어머니의 ‘포도 그림이 뛰어나서 세상에 시늉을 낼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신사임당이 화가로서 일가를 이뤘다는 얘기다. 일가를 이루려면 재능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신사임당은 자신에게 꽤 몰두했던 사람이다. 이런 신사임당에게 남편과 자식에게만 집중하는 현모양처를 바라기는 쉽지 않다. 그녀는 자식 교육에 그다지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풍부한 감수성을 물려주고 자신의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을 뿐이다.

익숙한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현모양처를 포기하면 신사임당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고정된 틀을 벗어나면 신사임당은 오히려 오늘날 더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올 수 있다. 자신의 문제에 제대로 집중하고 고민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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