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보며 공부한다? 미드·일드族의 변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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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15면

케이블TV에서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 시즌 6을 다시 보는데 (종영한 이 드라마의 광팬이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대사, “Ah, wallflower.” 자막 번역은 “아, 얌전한 여자분.” 원래 파티장에서 짝 없는 여성을 가리키는 ‘wallflower’는 남자의 대시를 기다리는 소극성을 칭하니 그럴듯한 번역이다. 어쨌든 영어 단어를 하나 복습한 데 힘입어 보고 또 본 드라마를 죄책감 없이 끝까지 즐겼다.

사소한 발견

최근에 빠진 미드는 ‘어글리 베티’. 멕시코 이민 가정 출신의 못생긴 베티가 뉴욕 패션잡지사에 입사하면서 겪는 좌충우돌 스토리인데, 관습적 여주인공 뒤집기는 ‘내 이름은 김삼순’ 저리 가라고 직장 세계의 정글 묘사는 ‘하얀 거탑’의 여성판이다. 몇 시간이고 빠져 보면서도 스스로 ‘어글리’하게 느끼지 않았던 것은 내심 ‘영어 리스닝 중이잖아’라고 위안한 바 없지 않다.

지난해 일본어를 공부할 거라고 일드 추천을 받았다가 배우 기무라 다쿠야의 매력에 빠져 전작을 죄다 구해 보았다. 수십 편을 되풀이 보다 보니 “우소-(거짓말!)” 같은 감탄사가 입에 붙었다. 그러나 “어머” 대신 “웁스”라고 내뱉는 게 영어 회화 실력을 보증해 주지 않듯 일드 중독자가 됐다고 일본어가 유창해졌을 리 없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미드·일드족 중 평소 한국 드라마 따위(!)는 안 본다고 과시하듯 말하는 이가 일부 있다. 대체로 고학력 엘리트인 그들의 드라마 감식안을 낮춰봐서가 아니라 유대감 확인 차원에서 물어보고 싶다. 혹시 드라마를 즐기는 게 ‘천박한 취향’ 같아서 어학 공부라는 핑계라도 있어야 자기 합리화가 되는 건 아니냐고. 그런데 재미에서 ‘의미’까지 캐내면 금상첨화지만 ‘의의’까지 챙기려다간 재미도 놓치기 십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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