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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놀이터로 날아오른 ‘구룡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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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18면

1. 구룡역에 용이 나타났다.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1학년 이승헌, 배환용 이준 이진우 박기휴 출연, 유호진 그림 .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구룡역’(분당선). 역 이름에서는 민간 설화에서 유래한 것 같은 사연이 느껴진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e)는 자신의 저서 『메트로(METRO)』에서 지하철을 ‘역사성이 중첩되는 대표적 공간’이라 말한다.

지하철 다시 보기 <9>

프랑스의 경우 많은 지하철역 이름이 과거 역사와 관련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부분 도시 지명은 식민의 역사와 함께 단절된 근대 행정구역의 이름이 사용된다.
근래에는 지하철역을 건축할 때 과거 잊혀진 이름을 복원하는 점이 특이하다. 대표적으로 구룡·장승배기·학여울·광흥창·먹골 등 새로 건설되는 지하철역은 옛 지명을 되살려 과거 지역성을 회복할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건축물 특성상 이미 기존 장소의 의미는 지워진 채 새로운 기능적 의미만 주목될 뿐이다.

2. 초능력 놀이.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1학년 이경환.

강남 貧富 명암 서린 역
구룡역은 오히려 설화적 의미보다 존재 자체가 사회적 기억을 담고 있다. 역 주변을 나서면 서울에선 보기 힘든 배나무 밭이 펼쳐져 있다. 근처엔 강남구 내 마지막 판자촌인 구(룡)마을이 있으며, 너머에는 부유함을 상징하는 타워팰리스가 솟아 있다. 구룡역은 강남의 빈과 부의 명암이 함께 드리워진 ‘과도한 잉여’의 기념비다.
구룡역에서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뚜렷한 정치적 목적, 행정가들의 딱딱한 손길이 느껴진다.

서울과 지방 위성도시를 효율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광역전철의 처음 계획에서 구룡역은 고려되지 않았다. 강남구청과 지역주민 생각은 달랐다. 이미 주변 교통이 충분히 발달되었고, 대부분 주민이 사적 교통수단을 이용하지만, 더 많은 편리와 조금이라도 더 집값을 상승시키기 위해 더 많은 지하철역(3개 역)을 요구했다.

결국 도곡역과 400m 정도, 개포동역과는 채 6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550억원이란 막대한 돈을 들여 구룡역이 들어섰다. 그마저 강남구청과 서울시 간 비용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운영이 늦어지다가 2004년 9월에야 세금 낭비라는 오명을 들으며 강남구의 23번째 지하철역으로 개통됐다. 지금도 구룡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그리 많지 않다.

마르크 오제는 현대사회의 공간이 점점 사회적 의미나 거시 역사적 기억은 사라진 채 주로 개인화된 기억을 담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현대 도시 공간에서 개인의 만남이나 횡단을 위해 방문하는 지하철과 같은 ‘익명의 공간들’을 ‘비장소(non-place)’라 설명한다. 이러한 공간은 개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장소감(placeness)’을 느낄 수 없이, 자아가 배제돼 더더욱 익명성에 묻히게 되는 공간이라 이야기한다.

제한적으로나마 ‘비장소 안’에서 실질적 행위자인 대중은 매일매일 이용을 하면서 사적 기억을 내면적으로 재구성해낸다. 예를 들어 개별적으로 축적된 라이프사이클, 또는 동물원의 노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처럼 우발적인 만남 같은 일상 속 사건들을 경험한다.

사적 기억 주는 대표 공공장소
이렇게 지하철은 대도시인에게 사적 기억을 부여해주는 대표적인 공공장소다. 작가 민지애는 구룡역의 이미 지나간 사회적 기억보다는 일상적 대중의 사적 기억에 주목한다.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비장소’에 놓일 수밖에 없는 처지인 개인들에 관심을 보이며 그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낸다.

인적 드문 구룡역 주변에는 개포고·경기여고·수도전기공고 등 학교가 많아 역은 주민들보다 주로 학생들의 통학수단으로 활용된다. 이 중 학교 특성상 비교적 통학거리가 먼 수도전기공고 학생들이 구룡역의 주 이용객이다. 작가는 8월부터 11월까지 구룡역을 주제로 수도전기공고 학생들과 함께 ‘아홉 마리 용을 타고 학교에 가다’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만약 공공미술을 공공장소를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작업으로만 이해한다면 구룡역은 이미 심미적 취향으로 완성된 공공미술의 현장이다. 그러나 공공미술은 단지 이용자에게 시각적 만족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공공미술은 공공장소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내고 구성해내는 공적 담론을 생산하는 작업이다. 이용자들은 담론 구성의 과정에서 대중공간 내에 익명이 아닌 주체임을 증명한다.

작가 민지애는 수도전기공고 학생들과 구룡역에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상상하며 내러티브로 구성하는 작업을 함께한다. 아이들은 아홉 마리 용에 얽힌 설화를 판타지 형식으로 지어내고 구룡역에 얽힌 자신의 일상, 로맨스나 사연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아이들 각자는 자신의 느낌과 추억, 생활에 따라 구룡역에 다른 이름을 붙여보며 캐릭터를 직접 그리는 드로잉 작업도 했다. 또한 작가는 참여자들과 함께 구룡역에 마치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상황을 재연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아이들은 구룡역을 색다르게 이용하는 방법을 상상하고 놀이하듯 사진을 만든다. 그들은 구룡역을 초능력을 재연하는 공간,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똑똑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공간, 마치 안방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공간 등 다양한 용도를 지닌 곳으로 발견해간다. 작가와 함께하는 이 작업을 통해 아이들에겐 구룡역이 상상력의 놀이터이자 학창 시절의 애증이 녹아 있는 삶의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이전 작업에서 사용되지 않고 버려진 공간의 의미를 재생하는 작업을 진행해온 작가 민지애는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그 연장선상에서 공간의 의미 변주를 시도했다. 수도공고 학생들과 함께한 이 공공미술은 거대 도시의 위압을 보이며 대중이란 익명성으로 묻히기 쉬운 지하철 ‘비장소’를 주체-행위자가 상상력의 시각을 불어넣어 다르게 전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자 사례로 남았다.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지하철 다시 보기’는 2008년 1월 9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덕원갤러리에서 ‘Metropolis in sub-way-world’란 제목으로 전시됩니다.


양기민씨는 문화사회연구소 상임 연구원으로 청소년을 위한 학습문화공간 ‘하자센터’ 기획 코디네이터이며, 민지애씨는 도시공간을 주제로 비디오 및 설치작업을 하는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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