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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ㆍ새 세대 준비하는 영국 왕실 대해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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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영국은 입헌군주국이다. 많은 왕실이 근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대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그러나 영국 왕실은 18~19세기에 입헌군주제의 발전을 통해 근대화의 격랑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지난 20일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결혼 60주년이었다.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사랑받고 있는 영국 왕실의 모습을 살펴본다.


영국은 전통과 관습을 중시한다. 영국 국왕에게 부여된 ‘신앙의 옹호자’라는 호칭은 교황 레오 10세가 헨리 8세에게 내린 것이지만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도 사용된다. 여왕이 의사당으로 연설하러 가면 하원의원 한 명은 버킹엄궁에 인질로 잡혀 있다. 왕과 의회가 대립하던 시대의 관습이 잔존하는 것이다. 영국에선 뜯어고치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래선지 원론적으로 따져볼 때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운 왕실이 건재할 수 있었다.

연원이 9세기로 올라가는 영국 왕가의 이름은 ‘윈저’다. 원래 이름은 독일계 이름인 ‘색스코버그고사’였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영국과 독일은 가까웠다. 그런데 1차대전이 터지고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퍼지자 당시 왕 조지 5세가 영국식 이름인 윈저로 개칭했다. 사실 독일어 억양이 없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윈저 계통의 왕은 1915년에 즉위한 조지 5세가 최초였다. 필립 공(에든버러 공작)의 원래 국적은 그리스이지만 가문의 뿌리는 독일계인 ‘올덴부르크가(家)’다. 찰스가 즉위하면 영국 왕실은 올덴부르크가라고 볼 수도 있게 된다. 이처럼 유럽에서 왕실 그 자체는 민족주의에 대해 이질적인 실체다.

영국은 민족주의가 야기한 전쟁에서 승전에 승전을 거듭했다. 왕실이 선봉에 섰다. 영국 왕실이 국가통합ㆍ정체성의 구심점이 되고 질서ㆍ전통ㆍ안정을 상징하게 되기까지는 강한 상무(尙武) 전통이 필요했다. 여왕도 군복무를 했다. 45년에 부왕을 설득해 군복무를 허가받았고 운전을 배워 군용트럭을 몰았다.

군주제는 민주주의보다는 독재에 더 가깝다. 군주제를 유지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영국은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해법을 찾아냈다. 영국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다. 통치하지 않아도 영향력은 적지 않다. 정치적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하고 투표권도 없지만 국왕은 초(超)당파적 권위와 영향력을 자랑한다. 입헌군주제 이론을 완성한 월터 배젓(1826~1877)은 왕에게는 “의견제시ㆍ격려ㆍ경고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총리는 여왕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야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모신 총리는 모두 12명이다.

1952년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81)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하나의 ‘제도’다. 여왕은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호주 등 16개국의 국가원수다. 54개 영연방 회원국 모두 여왕을 영연방의 수반으로 인정한다. 국회의 개원과 해산, 총리 임명, 전쟁 선포, 법령 선포도 여왕의 권한이다. 물론 모두 상징적이다. 실제로는 각국 총리가 대부분 ‘여왕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한다.

왕실은 그 상징과 명예를 선용(善用)하고자 애쓴다. 여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은 매년 3000여 건의 공식 행사에 참석하고 10만 통의 편지를 받는다. 이들은 약 3000개 단체의 후원자 혹은 회장직을 맡고 있다. 여왕은 600개 단체의 후원자다. 매년 왕궁에서 개최되는 오찬ㆍ만찬ㆍ리셉션에 참석하는 인원은 7만 명이다. 왕실은 100회 생일이나 결혼 60주년을 맞는 모든 국민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왕실은 화려한 권위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왕실은 영국 최대 지주다. 버킹엄궁, 윈저성, 홀리루드궁 등 왕실 궁전에는 6000여 개의 방이 있다. 왕실을 위해 645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뉴욕 타임스는 7월 15일 왕실 유지비가 연간 최소 2억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포브스의 추산에 따르면 여왕의 공개된 재산만 6억 달러에 달한다. 정부와 의회의 재정 지원, 임대 수입, 입장료 수입, 개인 투자 수익, 예술품, 보석 등 수입과 재산을 효율적으로 운영관리하기 위해 왕실은 일급 금융전문가들을 고용한다.

그러나 왕실은 20세기 후반부터 점증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영국에서 왕실을 폐지하자는 공화주의는 반역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군주제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94년에는 유력지 이코노미스트가 군주제 폐지를 공식 입장으로 밝혔다. 잇따른 왕실 사람들의 결혼 실패와 사생활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이 몰고온 파장도 컸다. 여왕은 다이애나가 아들과 이혼했기 때문에 다이애나의 죽음과 장례 절차는 스펜서 가문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왕실의 법도에 따라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를 애도하는 영국 국민 다수는 왕실의 매정함을 비난했다. 영국의 공화주의자들에게 군주제는 능력주의(meritocracy)에도 반대된다. 찰스 왕세자는 공부를 못했는데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시대가 바뀌었다. 선왕의 결혼식(1923)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는 결혼식이 라디오로 생중계되면 국민들이 술집에서 모자도 벗지 않고 ‘불경’스럽게 중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직 국민 다수는 왕실의 유지를 바란다. 그러나 점증하는 수의 국민이 왕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왕실옹호론자들은 대응논리를 개발하고 있다. ‘궁색한’ 옹호도 있다. 왕실이 관광산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자들은 대꾸한다. “왕이 없는 프랑스나 이탈리아도 관광객은 많다.” 세계화 시대에는 원군을 해외에서 만나기도 한다. 프랑스의 르네 도지에르 국회의원은 프랑스 대통령제 유지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며 영국 군주제가 더 저렴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왕실은 체질개선에 나섰다. 왕실 요트를 처분했으며 1993년부터는 자발적으로 소득세를 납부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왕실 공식 지출 규모를 공개했다. 2006년에는 버킹엄궁의 의전용 응접실까지 개방했다. 정보화 시대에도 적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여왕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디지털 파일로 받아 볼 수 있게 됐다. 전통과 관례에 따른 의전을 고집하는 왕실로서는 상당한 변신 노력이다.

여왕이 즉위한 지 55년이 넘었다. 선왕 4명의 재위기간을 합친 것보다 더 길다. 영국 왕실의 위상은 여왕의 개인적 인기에 크게 의존했다. 영국 왕실의 미래도 어쩌면 다음 세대 왕실 사람들이 하기 나름이다. 이들이 국민의 마음을 얻고 국민의 다수가 원하면 왕실은 유지된다.

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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