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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30> 가난한 자들이여! 천국이 너희 것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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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25면

여기 보이는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헤롯 대왕이 지은 제3성전의 서벽(Western Wall)이다. BC 960년에 완성된 솔로몬 성전(제1성전)의 자리에 세워진 것일 뿐 솔로몬 성전의 벽은 아니다. 헤롯 대왕의 제3성전은 BC 18년에 착공되어 알비우스 총독대에 완성되었는데, 역사적 예수가 본 성전의 벽은 바로 이것이다. [임진권 기자]

나는 매우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와 엄마가 모두 소년·소녀 시절부터 기독교를 자신들의 삶의 신앙체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요즈음과는 달리 20세기 초엽, 그들의 기독교 수용은 각별한 삶의 결단을 요구하는 실존적 행위였다. 나는 유아세례를 받았고 엄격한 기독교 윤리 속에서 자라났다. 나의 부친은 일제시대 때 의사로서 성공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삶에서 거둔 부를 자식의 교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에 헌납하였고, 자식들에게 일체의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평생 새벽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게 신앙적인 삶을 산 여인이었는데, 자식교육에 있어서도 기독교 신앙의 모든 원칙을 고수하였다.

산상수훈과 Q

엄마는 어린 나에게 신약성서를 모조리 외우라고 명하셨다. 성경구절을 외우면 용돈을 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회초리를 맞았다. 문지방 위에 얹혀 있는 회초리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성구를 암송하다 보면 가장 신나게 외워지는 구절, 가장 보편적으로 리듬을 타고 독송을 반복하게 되는 구절은 뭐니 뭐니 해도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이었다. 상식적으로 복음서의 기준은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마태복음이었고, 제5장의 산상수훈에 이르면 어린 마음에 이미 복음의 메시지가 절정에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글 개역판 그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예수의 산상수훈이 행하여졌던 곳에 세워진 팔복교회. 1938년 이탈리아 출신 안토니오 발루치의 설계로 건설되었다. 산들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이야기하면 예수의 목소리가 널리 퍼져갔을 것이다.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이 산상수훈은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것으로 Q복음서에 속하는 것이다. 마태는 주어가 3인칭 복수인 데 반하여, 누가는 2인칭 복수이다. 마태보다 누가는 짧은 데 반하여, 누가에는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설교가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항상 걸렸던 대목은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이 말에 대한 그럴듯한 주석들은 태산처럼 쌓이고 또 쌓여 있다.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갈구하는 심정이 더 간절해진다는 이야기는 대체로 수긍이 갈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나에게는 구체적으로 “심령이나 마음이 빈곤한 자”라는 이미지는 도무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심령이 충만해야지 어찌 심령이 가난하고 빈곤해야 한단 말인가? 심령의 빈곤을 지식의 빈곤으로 바꿔봐도, 또 지혜의 빈곤으로 바꾸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지식이 빈곤하고 지혜가 빈곤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심령이 가난하다” 할 때, 그 ‘가난하다’는 말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그럴듯한 구라는 얼마든지 피울 수 있겠으나,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었다.

나는 장성하여 동방의 철리를 연구하게 되었고, 『노자도덕경』이라는 도가 경전에 심취하게 되면서부터는 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 중 ‘가난’의 의미를 노자의 ‘허(虛)’로서 해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심령이 비어 있다, 마음이 비어 있다, 그래서 천국이 들어갈 여백이 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만큼 ‘심령이 비어 있어 순결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Q복음서의 발견은 이러한 복잡한 추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진리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복잡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맥심(maxim) 같은 것이 결국 몇 줄의 언설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는 복잡한 ‘심령의 가난’을 논구하지 않았다. 가난을 심령화한 것은 마태였다. 마태는 Q복음서를 초기 유대인 기독교도를 설득하기 위한 자료로서 활용했다. 그는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가르침이 결코 상치되지 않는 연속적 관계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 민족 서사시의 한 예언의 성취일 뿐이며, 모세 율법의 새로운 기원을 기독교인들이 계승적으로 창조해 나가리라고 생각했다. 산상수훈 내용 중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전형적인 마태의 창작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마 5:17).

엄밀한 문헌비평을 하여 보면, 마태보다는 누가가 Q복음서의 원래적 문맥과 순서에 더 충실하다는 결론에 도달케 된다. 누가복음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Q복음서의 예수는 아주 단순하게 그냥 “가난한 자”를 말했을 뿐이다. 그는 가난을 심령화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란 오직 돈 없는 자, 경제적으로 곤궁한 자, 의지할 데 없이 부랑하는 자, 돈이 없어 마음까지 가난해진 자일 뿐이다. 갈릴리 지평에서의 예수의 친구들은 돈 있고 부유해서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재산 빼앗기고 농토 빼앗기고 올데갈데없이 부랑하는 홈리스들이었다. 그래서 이어오병의 설화가 말해주듯이 사오천 명씩이나 예수라는 지도자를 따라서 몇 십 리 길을 며칠씩 부랑하곤 했던 부평초 같은 민중들이었다. 예수는 바로 이들에게 천국을 선포했던 것이다. 왜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는가? 왜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부자들은 돈과 재물과 소유에 집착하는 데 반하여 가난한 자들은 집착할 건덕지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Q복음서와 도마복음서를 일관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바로 ‘무소유’다. 이 무소유의 사상이야말로 원시불교의 사상인 동시에 원시기독교의 핵심사상이었다. 무소유는 바로 현세적 가치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Q복음서는 말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생각으로 눈멀지 말라. 부질없는 염려를 끊어라. 심령과 영혼을 결한 자들만이 이런 것들을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주어지리라(Q 53, 눅 12:29~31, 마 6:31~33).

Q복음서는 또 원시불교가 말하는 멸집(滅執)과 동일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를 잃을 것이요, 자신의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나를 따르는 자는 오히려 삶을 향유하리로다(Q 58, 눅 17:33, 마 10:3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훔쳐가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Q 54, 눅 12:33~34, 마 6:19~21).

이러한 논리를 세속교회 조직은 교회에 헌금하라는 명령으로 왜곡하여 신도를 기만하는 데 사용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예수에게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현세적 가치의 부정으로서 이러한 무소유의 논리를 철저히 관철시킨 지혜로운 사회사상가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Q복음서의 예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소유와 집착에 광분한 자들의 혼탁한 잔치를 과연 이 조선땅의 기독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묻겠노라! 이 땅의 민중을 이끌겠다고 나선 정치적 지도자라고 한다면, 더욱이 기독교인임을 자처하고 나선다면, 무소유를 실천하고 이 땅의 재물을 거부하고 저 하늘에만 보물을 쌓아둔 부끄럼 없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게 할렐루야 만세를 보내는 광란의 민중들을 과연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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