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어느 예술후견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얼마전 나는 가까운 어른 한분을 잃었다.미대에 진학한 후 화단 말석에 들어오기까지 내게 격려와 용기를 주시던 어른이다.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용기를 주시던 그분은 사실 일자무식의 시골농부였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그 소중함을 아시는 분이셨다.먼 인척지간인 그분은 소싯적부터 배움은 깊지 못했어도 경우가 반듯하였고 정치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훤한 한량이었다.어렸을때 농사를 팽개치고 대처로 휭하니 갔다가 빈털터리로 와선 『형님 저 왔심다』하고 쩍하니 우리집에 들어서 던 일이나,우리 아버지에게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금방 어깨가 축 늘어져 돌아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생시에 그분은 이따금 학교의 내 연구실로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하시곤 했다.용건이라는 것이 대개 뻔하였다.『거 머시냐.요참에도 쬐끄만 산수화 하나 쳐 줘야 쓰것다.
솔낭구를 좀 튼실한 놈으로 몇개 앉히고 폭포는 너 무 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성 싶다만….』 그 어른이 이런 부탁을 해오면 나는 거절할 수가 없다.왜냐하면 농협에서 융자를 얻는다거나,관공서에 급한 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어려운 사정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소싯적 이후 시골에선 드물게 「깨인」양반이셨던 그분은그런 자리의 선 물로는 그림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그러나 언젠가는 그림을 받으러 오셨다가 입맛을 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농협 융자를 받으러 그림을 건넸더니 그림을 받은 직원이 『서울로 다 알아봤는데 조카가 별로 유명한 화가가못 되더라』며 슬그머니 다시 되돌려 주더라는 것이다.그래 화가머리끝까지 올라 그 직원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치며 고래고래고함을 쳤다고 했다.
『이놈아 내 조카가 대한민국에서 그림으로는 젤가는 사람이다,이놈아.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찾아봐라,이 시러배놈아.』 그러면서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덧붙이셨다.『조카,기왕 그판에 뛰어들었으면 조깨 유명해지지 그랬는가?』 내가 미대에 가겠다고 했을때 대소가가 시끌벅적했지만 『앞으로는 예술이 세진다』는 전위적인 발언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렸던 그 어른.어디 신문 한귀퉁이에서 이름 석자라도 보시면 새벽같이 전화를 해주시던 그 어른.그림도 농사같이만 마음먹으면 되는 것이라고 하셨던그분. 그러고 보면 그분이야말로 내 예술행로를 지켜봐 주시던 후견인이었던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