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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주목받는 엔-캐리 자금 체력 떨어지면 기승부리는 바이러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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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21면

블룸버그 뉴스

“바이러스(엔-캐리 자금)는 숙주(선진국 시장)가 건강할 때 잠복해 기회를 본다. 그러다 숙주가 허약해지면 병을 일으킨다.”

뉴욕대학 노리엘 루비니(경제학) 교수의 블로그에 지난 4월 오른 글의 한 부분이다.

이 구절만큼 엔-캐리 트레이딩(금리가 싼 일본 자금을 빌려 다른 통화 자산에 투자하는 것)의 특성을 잘 묘사한 것도 없을 법하다. 요즘 엔-캐리 자금이 투자를 청산해 일본으로 역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다시 증폭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증시가 흔들리고 있다. 과민반응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미국을 필두로 한 선진국 경제와 글로벌 금융시장의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틈타 바이러스가 기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엔-달러 환율은 장중 한때 109엔까지 하락했다(엔화가치 상승). 일본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약간 상승하기는 했지만 110엔대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5월 이후 17개월여 만에 최저 수준이다.

선진 증시의 온도계

달러 등 선진국 통화와 비교한 엔화가치의 상승은 과연 위기 신호일까, 아니면 시장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지난주 미국 자산운용사인 피셔인베스트먼트가 흥미로운 보고서를 내놓았다. 최근 1년 동안 선진증시 주가와 엔화 환율이 ‘어깨춤을 나란히 췄다’는 분석 결과였다. ▶미국 다우지수와 엔-달러 환율 ㄴ영국 FTSE100지수와 엔-파운드 환율 ▶독일 DAX지수와 엔-유로 환율 ▶호주 종합주가지수와 엔-호주 달러 환율 등의 상관계수가 0.8 이상이라는 것이다<그래픽 참조>.

이는 환율과 지수가 통계학적으로 얼마나 관련성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상관관계에서 -1이면 움직임이 완전히 반대이고, 1이면 완전히 일치한다. 0.8은 미세한 엇박자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나란히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셔의 최고경영자(CEO)인 켄 피셔는 “엔-캐리 자금이 선진시장 구석구석에 퍼져 있기 때문”이라며 “이를 익히 알고 있는 시장 참여자들이 엔-선진통화 환율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주가 흐름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시장의 반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부초 같은 자금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금융기구들은 엔-캐리 자금 규모가 1조 달러 수준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일본인들이 신탁계정 등을 통해 해외에 투자한 자금뿐 아니라 해외 은행과 투자은행, 헤지펀드·사모펀드 등이 일본에서 조달해 해외에 뿌려놓은 돈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글로벌 전체 유동성과 견주면 엔-캐리 자금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엔-캐리 자금의 성격이 장기 분산투자보다는 단기 금리차를 따먹기에 치중한다는 사실이다. 장기 투자를 꺼리고 부초처럼 떠돌아다닌다는 면에서 핫머니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국 금리정책뿐 아니라 글로벌 증시의 작은 악재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불거진 올 3~4월과 본격화한 8~9월 엔화-선진통화 환율은 급격히 하락했다<그래픽 참조>.

타들어가는 뇌관

일부 전문가들은 엔-캐리 자금이 역류한 2003년 주가가 폭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엔-캐리자금이 역류하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아시아 금융위기 등을 정확히 예언한 ‘닥터 둠’ 마크 파버는 “당시 선진경제는 본격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며 “엔-캐리 자금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자금들이 메워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01~02년 선진 각국의 경제는 침체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글로벌 유동성도 빠르게 늘어났다. 미국 집값을 비롯해 글로벌 자산가격이 오름세를 타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고수익을 위해 공격적으로 움직인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다. 미국의 집값 하락으로 서브프라임 사태가 진행 중이다. 자금이 금 등 안전한 곳을 찾아 대거 이동하고 있다. 일부 시장에서는 신용경색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집값이 더 하락하고 고유가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본격화하면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경기침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바이러스(엔-캐리 자금)가 맹렬히 활동하기 좋은 조건(선진경제 체력 저하)이 무르익고 있는 셈이다.

2003년처럼 또 다른 자금이 엔-캐리 자금이 떠난 곳을 메워주면 충격은 덜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만큼 저금리 자금원이 돼줄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중국이나 산유국들이 자금을 넉넉히 갖고 있지만, 금리가 현재 일본보다 월등히 높아 역부족일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1987→1997→2007?

전문가들은 엔-캐리 청산으로 비롯된 두 번의 위기를 되짚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번의 위기는 바로 87년 미 증시폭락(검은 월요일)과 97년 아시아 금융위기였다.

‘가미카제 거품’ 시기였던 86년 일본 저금리 자금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 가운데 금리차를 이용해 수익을 노린 자금이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거 투자됐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공모방식으로 처분한 통신회사 NTT 주가가 87년 급등하자 일본인들은 미 정부 채권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NTT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그들의 매도 공세로 미 재무부 채권값이 하락(수익률 상승)하자, 마침 미 금융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한 프로그램 트레이딩 컴퓨터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채권 수익률의 상승에 따라 주식의 상대적인 투자매력이 떨어졌다. 컴퓨터들은 자동적으로 미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는 다른 악재 등과 어우러지면서 10월 19일 주가 대폭락으로 이어졌다.

지난 97년 엔-캐리 자금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태국에서 사단을 일으켰다. 은행들이 이자율이 낮은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해 상대적으로 고금리인 동남아 시장에 잔뜩 뿌려놓았다. 그런데 경제에 위기 증상이 나타나자 엔화 자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발단이다. 두 차례 모두 엔-캐리 자금의 절대 이동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조밀하게 연결된 금융시장 메커니즘을 타고 엄청난 연쇄 파장을 몰고왔다. 그런데 10년 만인 올해 엔-캐리 자금이 다시 글로벌 금융시장의 복병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덩치도 많이 커졌다. 글로벌 시장은 과연 엔-캐리 자금의 횡포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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