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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읽기] 색깔 잃은 색맹, 더 특별한 능력을 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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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색맹의 섬
올리버 색스 지음,
이마고,
400쪽, 1만4000원

색깔 없는 세상에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쉬쉬하는 문화 탓에 주변에 색맹이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통계 수치를 보자. 붉은색과 녹색이 무색이나 누런 색으로 보이는 적록색맹은 여성에겐 드물지만 남성은 20명 당 1명에 이른다. 명암은 느끼지만 사물을 흑백사진처럼 보는 선천적인 전색맹도 3만~4만 명 당 1명꼴로 있다.

여행기이자 인류학적 관찰기인 이 책에는 ‘그들’을 ‘우리’로 받아들인 ‘색맹의 섬’이 등장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조그만 섬 핀지랩이다. 섬 인구의 1/3이 ‘마스쿤’(‘안 보인다’는 토속어로 색맹을 지칭) 유전자를 갖고 있고, 인구의 10%가 전색맹이다. 색맹 발병률도 12분의 1이다. 상황이 이러니 아기가 환한 빛에 얼굴을 찡그리기 시작하면 아기가 보는 세계가 어떤지, 아기의 ‘특별한 능력’이 무엇인지 모두 안다.

색맹 아이들은 청력과 기억력이 뛰어나다. 이들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고자 자기 옷의 색깔, 주변 물건의 색깔을 전부 암기한다. 핀지랩에서 가장 아름다운 깔개를 짜는 사람은 실타래에 숫자를 매겨 밝기만으로 색을 구분하는 색맹 여인이었다.

“색맹이란 말은 우리에게 없는 것만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요. 저에게 해질녘은 마법 같은 시간입니다. 극명한 명암 대비가 없어 시야가 확장되고 시력도 갑자기 좋아집니다. 제 인생 최고의 경험은 해질녘이나 달빛 아래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저에게 가장 행복한 추억은 거대한 삼나무 숲에 누워 별을 구경하던 순간입니다.” 또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의 고백이다.

미 컬럼비아대 메디컬센터 임상신경학·임상정신의학 교수인 저자는 이뿐 아니라 신경퇴행성 풍토병이 많은 괌과 로타 섬도 훑는다. 기억을 잃어가는 이가 “또 오세요. 선생님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 만나면 또 굉장히 반가울 겁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보듯 병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곳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섬은 축복 또는 저주 받은 장소다. 섬은 다람쥐원숭이, 코끼리거북이 등 독특한 생물의 보고다. 하지만 고립돼 있기에 질병이 유전되기 쉬운 ‘자연의 실험실’이기도 하다. 신기한 것은 섬이 바깥 세상에 열리면서 유전적 특성은 희소해지고 병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는 외부의 침입에 소중한 것을 잃어야 했던 가슴 아픈 역사와도 연결된다. 한 노인은 토로한다. “우린 에스파냐 사람이 되는 법, 독일 사람이 되는 법도 배웠고 일본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는데 이제는 미국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소. 다음엔 또 뭐가 되는 법을 배워야겠소?”

하지만 이러한 섬에서는 여전히 ‘아득한 시간’과 마주할 수 있다. 현란하나 사람이 빚은, 덧없는 가공물로 둘러싸인 ‘뉴욕의 도시섬’에 산다는 저자는 말한다. “로타 섬의 소철 숲을 거닐면 태고의 지구를, 서로 다른 생명의 형태들이 진화하고 태어나는 더디고 지속적인 과정을 살갑게 느끼게 된다. 나보다 더 큰, 더 고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느낀다.”

책 곳곳에 들어간 그림의 다채로운 색은 눈부신 태평양의 빛깔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사는 곳도 우울증 같은 풍토병이 유전되는 섬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들, 소설과 처세서에 질린 이들, 어렸을 적 파브르 곤충기를 좋아했던 이들에게 권한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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