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화려하게 조명 받던 무대 막 내려”

중앙일보

입력

▶92년 9월, 광양제철소 준공식을 마치고 박태준 회장과 환담하는 최원석 회장. 동아방송예술대학 개교 10주년 기념행사 때 각별한 축하를 해준 사람이 박 회장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코노미스트 최 회장은 담담하게 마무리를 짓듯 정리를 했다. 배석한 옛 중역이 그동안 정부가 선별적으로 사면복권한 기업인에 대해 부언하려고 하자 “불필요한 얘기 하지 마시오. 그건 내 입으로 해야 할 소리가 아니오. 기업 했던 사람이 정부 권위를 폄하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물론 회사의 잘못도 있지요. 그러나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우리가 IMF 사태 나기 전까지 국내 도급 순위로 매년 2등만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1등을 해보겠다는 욕심 때문에 계열사 사장들이 무리를 해가지고 잘 알지도 못하는 재개발사업까지 벌이면서 금융권에서 7000억원 정도를 빌렸는데, 그게 발목을 잡힌 원인이 됐어요.

그걸 일일이 체크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지만 변명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특히 1994년 10월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후부터 각 계열사를 전부 전문경영인(사장) 체제로 돌렸어요. 이건 재계에서도 다 아는 일이야. 리비아 대수로 공사 같은 큰 프로젝트만 직접 관여하고 국내경영은 전문경영인들한테 전권을 줬어요.

그런데도 등기부상의 회장이라고 나한테 무한대의 책임을 물었소. DJ께서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던 97년 크리스마스 전날, 경제5단체장들 불러놓고 첫마디가 뭐라 했소? 재벌구조를 타파하는 기업구조조정을 해라,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라, 얼마나 강도 높게 종용하고 강조했어요?

그러고 나서 98년 6월에는 IMF 총독부가 한국에 와 있다면서 또 엄청난 발언을 했잖소. 말을 안 들으면 정부가 금융기관을 지도하겠다고 말이야. 그래 놓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갔던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무한책임을 지우면 어느 누가 정부 정책에 호응하고 어떻게 전문경영인을 두겠소.”

최 회장은 자신의 과오를 전문경영인들에게 넘기겠다는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순응한 기업주가 오히려 무한책임이라는 이중적인 짐을 짊어지게 되어 있는 구조적인 모순을 강하게 지적했다.

“재판 과정서 모든 책임 떠넘겨”

사실 DJ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 때부터 경제5단체장들을 국회 귀빈식당으로 불러 대기업의 구조조정과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 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을 시켜 대기업이 말을 듣지 않으면 금융기관을 다스려서라도 잡으라고 했을 정도로 대기업 구조조정과 전문경영인 우대정책을 최우선으로 밀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내가 IMF 사태가 온다는 걸 파리에서 리비아 대수로청 장관 만날 때 처음 정보를 들었어요. 그래가지고 황급히 서울에 연락을 했는데, 재무관리까지 사장들한테 전부 맡겨놓고 철저히 책임경영을 하라고 했으니까 내 자신이 재무상태를 몰랐던 거지요. 하여간 연락하니까 사장들이 2700억원이나 있으니 괜찮다고 그래요. 맡겼으면 믿어야지.

그런데 그 소리 듣고 안심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고, 나중에 재판을 할 때는 거짓말에다가 모든 책임을 나한테 떠넘기는 걸 보고 배신감도 한없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모든 게 내 탓이더라도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력히 종용한 정부가 문제만 되면 회장이라고 무한책임을 지우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느냔 말이오.

법적 장치는 하나도 마련해 놓지 않고.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기업 하는 사람들은 전부 공감할 거요.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을 뿐이지 공감한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요.”

어찌 보면 언론의 역할이 한없이 허약했다고 지적하는 소리로도 들린다. 사실 그동안 동아그룹 사태에 대해 언론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채권단이나 정부 쪽에서 나오는 자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다 보니 그런 자료만을 근거로 기사가 작성돼 동아사태가 충분한 분석 없이 일방적으로 보도된 점이 없지 않았다.

현실적인 한계가 있기도 했었지만 김포매립지 문제를 포함해 리비아를 비롯한 중동지역과 많은 국내외 공사에 대해 객관적인 자산을 보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동아그룹 입장을 전하는 보도자료나 증언들을 외면하다시피 했다는 것도 피하기 어려운 지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최 회장 개인에게도 국민이 편향된 인식을 가지게끔 하는 여러 부작용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최 회장은 당나라가 쇠락할 때 나붙었던 만사휴의(萬事休矣·모든 일이 어찌할 길이 없더라)라는 말로 새삼스레 언론을 탓할 생각은 없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명예회복을 못한 아쉬움은 끝없이 남는 듯했다.

최 회장은 수단에 대한 얘기를 끝 정리하듯 덧붙였다. 동아를 회생시키고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후원자가 리비아와 수단 정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단 정부는 2003년 6월, 최 회장을 정식으로 초청했다. 2002년 4월 소액주주들이 최 회장을 동아 회장으로 복귀시켰지만 경영권이 주어지지 않아 사실상 비상할 수 있는 날개가 잘려버린 상태였다.

그런데도 수단 정부는 최 회장이 어떤 입장에 처해 있건 개의치 않고 그를 환대했다. 그리고 수리부, 전력자원부, 산업부 장관 등이 최 회장을 끌어안고 수단의 물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최원석 회장은 항상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 수단을 방문했을 때도 건설부 장관이 활주로에서 직접 영접했다.

-수단이 90년대 중반부터 석유 수출을 본격화하면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가서 보니까 마치 70년대의 중동 같습디다. 사회간접자본시설이 상당히 낙후돼 있었는데 그런 중에도 전력하고 물 공급 상황이 특히 좋지 않아요. 어느 나라나 물 사정이 좋지 않으면 경제발전에 한계가 있잖소. 수단이 그래서 나를 초청했는데, 더구나 수단이 리비아하고 국경을 맞대고 있잖아요. 그러니 정·재계 인사들 중에 많은 사람이 리비아에서 해왔던 동아건설의 활약상을 잘 알고 있는 거지요.

기술고문들 중에는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에서 동아의 현지 소장으로 일한 분들도 많이 있고. 그러니까 아주 반갑게 맞아주고 국가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길게 설명할 것도 없고 금방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거지요. 그것만 됐어도 동아는 절대 죽지 않았어요.”

“감방에서 미치지 않은 게 용해”

그러나 만사가 허사가 됐다. 그리고 본인의 표현대로 ‘서울 고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를 온갖 경제사범으로 취급하고 외환위기를 몰고 온 주범으로까지 몰아가요. 너무 억울하잖소. 그래서 끝까지 법정투쟁을 하겠다고 했더니 그게 괘씸죄에 걸렸는지 법정구속이라, 허허허.’ 이것도 주저앉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물론 최 회장은 최소한 집행유예나 무죄를 받고 홀가분하게 법정을 나올 것으로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고 판사가 오해한 것 같다면서 나름대로 해석했지만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법정구속’이 되면서 상황은 돌변했고 결국 수단 정부와 약속한 프로젝트도 무산됐다는 것이다.

“감방에 들어가자마자 코를 골고 잤어요. 다른 수감자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재벌 회장이라 역시 통이 크다’고 한마디씩 했다는데 남들이 내 속을 어찌 알겠소. 그동안 오만 가지 생각으로 잠을 못 잔 날들이 하루 건너 나흘씩이고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찬물로 입술만 적신 날들이 거의 매일이었소. 그런데 법정구속이 되니까 탈진 상태에 빠지는 겁니다.

감방 생활 6개월에 동상이 걸려 지금도 발가락이 새까만 색인데 그런 것도 의식할 겨를이 없고 분하다는 생각, 죽고 싶다는 생각, 빈 항아리만 남은 집에 시집 온 아내 생각, 그야말로 머릿속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환청이 들리고 눈만 감으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는데 미치지 않은 것이 용하지요.”

-수단 정부가 계획한 공사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수력발전소 하고 농작에 필요한 관개수리용 댐을 세 곳에 건설하는 건데 1단계 공사만 22억5000만 달러였소. 결국은 그것도 실망만 안겨준 셈이 돼버리고 말았는데, 2003년 6월에 MOU를 체결하고 돌아와서 한창 계획을 세우던 중에 법정구속이 됐잖아요. 그때가 2004년 1월이거든.

내가 경영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국가 프로젝트를 맡아달라고 해서 어렵겠다고 했더니 자기들은 동아사태를 일시적으로 본다면서 긴 얘기 없이 MOU를 체결하자고 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오.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동아건설을 매각한다고 떠들썩했던 재작년까지도 어떻게 되느냐고 관심을 보이고 연락이 왔으니까 말이오. 그러니 그 좋은 인맥들에게 전부 결례만 하고.”

긴 시간 궁금해 하는 부분을 모두 들려주면서도 최 회장은 그동안 맺어온 우인(友人)들이 떠오르는 듯 가끔은 허허로운 심정을 토하기도 했다. 해외공사 수주에서 가장 큰 무기는 장비나 기술이 아니라 인맥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게 업계의 믿음이다.

인맥보다 더 정확한 입찰가가 없다고 하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거대한 국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국력이 아니라 인맥의 힘이 듯 해외 건설시장도 인맥 앞에는 강자가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인터뷰를 끝내겠습니다. 언젠가 국회 국정감사 때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았습니까?
“두 번 했지요. 재벌 총수들은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는 방법을 다 터득하고 있다는데 나는 그런 기술 안 부리고 부르는 대로 나갔어요. 그게 2003년도 9월 정기국회 국정감사인데 은행 문제로 정무위원회에 나갔고 건설교통위원회 국정감사 때도 나갔지요.”

“동아건설 파산시킨 이유 뭔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문제를 제기하고 답변을 들으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 했다면 그것은 국민의 마음을 대신했던 것이 틀림없다. 2003년 10월에 열린 정무위원회 국감에서 의원들은 동아건설에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는지를 묻고, 투입이 되지 않았음에도 공기업이 아닌 사기업의 대표이사 회장이 퇴임을 한 것은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외압에 의한 강제 퇴출이 아니냐고 집중 추궁했다.

그리고 10월 10일 건교위원회 국감에서는 최종찬 건교부 장관에게 ‘국가가 동아건설을 파산시켜 이득을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의를 해 결국 동아의 파산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결과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국감장에서 특별히 강조했던 말씀이 있었습니까?
“새삼스럽게 그런 얘기보다는, 지금 내 심정은 세계 건설시장을 냉정하고 깊숙이 봐야 된다는 거예요. 해외시장은 광범위하고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시장은 따로 있다는 거지요. 동아는 치수(治水)에 대한 세계적인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었으니까 절대 고급 노하우를 썩히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기업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파산을 시켜 국가경제에 어떤 실익이 있었는지 내가 묻고 있는 게 아니잖소. 우리 국민이 묻고 있고 전 세계가 묻고 있는 상황 아니오. 지금도 동아가 있었으면 하는 프로젝트가 중국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다는 게 뭘 얘기하는 거겠소.

세상에서 인간이 버려서는 안 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젖을 빨던 어머니에 대한 체향이고 또 하나는 건설기술이라고 합디다. 탄생과 건설은 영혼의 집결체라는 얘기로 나는 해석하고 있어요. 나한테 경영권만 있었으면 회생시킬 수 있는 복안이 있었느냐고 묻는 바람에 이런 얘기들을 하게 됐는데, 참 안타깝기가 그지없어요.”

예순을 훌쩍 넘은 최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절에서 내려오는 사람처럼 무심(無心)을 가슴에 심고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워낙 가혹한 시련을 겪은 것이 오히려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매사에 초연해지도록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건설에 대한 애정만큼은 여전했다. 진작 깨닫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 심중 속에는 회한과 함께 미래의 자신을 볼 수 있는 청량한 물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화려하게 조명 받던 무대도 막이 내려졌어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한 시절 국가경제에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예의가 된다고 보지요. 내 자신이 국가의 은덕도 많이 입었고 사회로부터 많은 도움도 받았는데 새삼 경제를 흔들 수 있는 일을 다시 법정에 올리고 한다면 그건 사심이 앞서는 거겠지요. 물론 나도 인간인데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소.

내가 평생 동안 일구어 놓은 자산이 불에 탄 오동나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가 자식처럼 정을 쏟으면서 다듬어왔던 36건에 달하는 부동산이 모두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내 품을 떠났으니 그 자산들이 절대 허접한 대우를 받을 만큼 부실하게 가꾸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되찾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동아그룹이 경제에 짐만 지운 게 아니라는 평가를 받을 거라 믿고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사실 동아건설 문제는 모든 매각 절차를 마무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파산으로 몰아가던 때와 비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매각처리를 했다는 점에서 채권단이나 정부의 태도는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몇 가지 내용만 짚어보면 알게 된다. 그동안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서울지법 파산부는 2001년 5월 11일 동아건설에 대해 파산선고를 내렸다. 사실상 회생의 기회가 박탈된 것이다.

그러했던 전례에 비추어 2006년 3월, 동아건설을 매각할 때는 잔뜩 손님을 끌어 모은(인수의향서를 제출한 14개 업체 중에 6개 업체가 본 입찰에 참여) 채권단 골드먼삭스와 자산관리공사가 뜻밖에도 동아건설을 매각하게 되면 법정관리를 실시하는 방식으로 동아를 회생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발표했다.

전 동아건설(편의상 매각 전 동아) 때는 아우성을 쳐도 법정관리라는 보호막을 쳐주지 않더니 이때는 채권단이 법원 의사도 듣기 전에 애드벌룬부터 띄웠다.

이렇게 되자 파산선고 이후 동아건설 측에서 두 차례나 법정관리 개시 신청을 했지만 모두 기각했던 법원파산부가 ‘매각이 성사될 경우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2006년 8월 프라임산업을 동아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캠코와 골드먼삭스는 한발 더 나아가 법정관리를 전제로 매각한다는 사실에 힘을 실어 강조했다.

이때는 언론들까지 의아스럽다는 기사를 실었다. 법원이 법정관리로 전환을 승인할 경우 동아건설은 파산 절차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법정관리로 전환되는 첫 사례가 된다고 일제히 보도한 것이다. 말하자면 전 동아건설 때는 그런 방법이 없어서였던가를 묻고 있는 셈이었다.

▶최원석 회장은 제2의 인생을 영화감독으로 불태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DIMA(동아방송예술대학)가 제작하는 ‘굿바이, 테러리스트’ 촬영 모습.

오욕의 환경 이겨낼 수 있을까

물론 법원이 매각 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내세운 명분은 전 동아건설과 비교할 때 새 동아건설은 ‘인수자가 선정될 경우 기업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고, 그동안 재무상황이 개선되고 회사 규모도 축소된 만큼 긍정적인 결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황당한 논리였다. 2006년 8월 동아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프라임산업이 선정됐다고 발표됐을 때 파산관재인이 법원에 보고한 2006년 6월 말 기준으로 새 동아건설 총 자산은 6920억원, 총 부채가 6조4444억원으로 순자산은 마이너스 5조7524억원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전 동아가 파산선고를 받을 때 부채보다 자산이 더 많았다는 최 회장 주장을 무시하고 건교부가 제출했던 자료를 근거로 한다고 해도 전 동아는 자산 3조3373억원에 부채 4조8181억원으로 순자산은 마이너스 1조4808억원이었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1조4808억원이던 부채가 그 사이 마이너스 5조7524억원으로 늘어났는데 무엇으로 새 동아건설에 대해 기업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고, 재무상황은 어떤 수치로 개선됐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 회장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 끝내 말이 없었다. 그저 입가에 해석하기 어려운 미소만 담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으로 비교해 보라는 주문도 없었다. 그는 동아방송예술대학 집무실을 장식하고 있는 수반의 연꽃에 눈길을 주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감했다.

수많은 연꽃이 만개한 저수지를 바라볼 때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의 연밭이다. 아름다운 연꽃은 갯벌보다 더 끈적거리는 땅에서 숱한 오물에 더럽혀지고 무수한 미생물과 거머리에 뜯겨야 마침내 일경일화로 피어 오른다.

오직 하나의 꽃대에 하나의 꽃으로 피는 연꽃은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하늘을 보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꽃말을 지니고 있는 것도 오욕의 환경을 이겨냈기 때문인지 모른다.

최 회장의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코노미스트 913호>

이호·객원기자·작가 [leeho5233@hanmail.net]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