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이회창씨가 그때 이랬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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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있었던 일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교수 몇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한국 근대 정치사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1990년 있었던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공화당의 3당 합당의 성격에 대해 “민주화 세력이 산업화 세력을 흡수했다”느니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통합”이라느니 논란이 벌어진 끝에 나온 YS의 한마디가 참석자들을 머쓱하게 했다고 한다.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 3당 합당을 했다.”

자신이 당명을 바꾸고, 또 두 번이나 그 당의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 나갔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도 따지고 보면 YS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나라당 후보가 매우 불안하다”거나 “이명박 후보의 대북관이 애매모호하다”는 그의 주장은 탈당과 정계 은퇴 약속을 번복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그가 혹독한 비난을 무릅쓰고 나선 것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흔히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고 한다. 하늘의 뜻을 받아야 임금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시대가 원하지 않으면, 시대정신에 맞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회창 무소속 후보는 그런 점에서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았다. 대통령 문턱에서 넘어진 불운한 후보였다. 그런데 1997년과 2002년에는 갖추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갖춘 듯하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회창 후보의 최근 행보는 그의 정치적 감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가끔씩 후보들을 비판함으로써 출마의 명분을 비축했고, 이명박 후보가 선출된 뒤에는 각종 의혹으로 지지율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을 보였다. 그게 기대처럼 되지 않자 이번에는 흥행이 될 시점을 골라내는 안목을 선보였다. 출마 가능성 시사-측근들의 카운트다운-본인 잠적-출마 선언으로 관심을 끌어 모았다. 예전의 그에게서는 찾기 어려웠던 정치감각이다.

과거의 그는 늘 절제되고 단정했다. 정치적 제스처라고는 ‘노풍(노무현 지지 바람)’이 거셌던 2002년 5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된 뒤 갑자기 큰절을 했던 게 거의 유일하다. 눈물을 흘린 것도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을 때뿐이다. 그런 이회창씨가 이번에 출마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당을 떠나는 심정을 피력했을 때에는 잠시 목이 멨다. 선언문도 감성적 표현이 가득했다.

그는 출마 선언한 뒤 소년소녀 가장과 중증 장애인 노부부 가정을 찾아 “정치인이 사회적 약자의 심정을 이해해야 하며 정치를 이런 눈높이에서 하려고 한다”고 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있어서도 과거의 오만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자신을 낮춰서 도와달라고 한다. 이제야 정치인이 된 것 같다. 아들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됐을 때에도, 호화빌라 3개 층을 쓰는 데 대한 지적이 나왔을 때에도 “법적으로 아무 잘못이 없다”며 버티던 그였다. 법만 알고 국민 정서는 아랑곳하지 않던 이회창, 자존심 강한 귀족 이회창은 달라진 것일까.

그의 출마에 대한 충청 지역의 지지율이 유난히 높은 것도 묘하다. 그는 두 번의 대선에서 충청지역에서 패배해 고배를 마신 것이나 다름없다. 1997년엔 김종필(JP)씨가 김대중(DJ)씨와 연합하는 바람에, 2002년엔 노무현 후보의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 공약 탓에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충청 지역의 지지가 가장 튼튼한 버팀목이라니. 지금 추세로 간다면 그는 이번 대선에서 역할을 찾지 못해 허전해 하던 충청권의 대표 주자로 우뚝 서게 될지도 모른다.

진작 이회창 후보가 이런 정치적 감각과 충청권의 지지가 있었다면 지난 두 번의 대선 중 한 번은 승리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그에게서 결여된 것들이 지금은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한을 풀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것을 갖추었지만 그 대신 명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