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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스토리] 어머니, 우리 삶의 시작과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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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일생에서 어머니는 시작과 끝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눈을 맞춘 이도, 말을 배워 입을 뗀 첫마디도 ‘어머니’이다. 어머니와 만남은 세상과 만남으로 이어지고, 어머니로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후에도 어머니란 존재는 여전히 마음 놓고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한 둥지다. 브레이크가 없다면 속력을 내어 달릴 수 없듯이 돌아갈 곳이 없다면 어떻게 더 멀리 더 높이 날 수 있으랴. 어머니가 있어 등 뒤를 걱정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다, 우리는.

어머니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춥고 시릴 때 그 모습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지는 따뜻함이고, 상처받아 고통스러울 때 상대를 용서할 수 있게 하는 치유의 이름이며,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싶은 절망의 순간에도 어머니의 젖을 먹던 힘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는 희망의 이름이다. 따라서 1987년 첫 사진집 출간 이후 26회의 개인전과 14권의 사진집을 낸 사진가 윤주영 선생이 팔순을 기념하여 전시하고 출간하는 사진집의 주제가 ‘어머니’라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 사회의 급변하는 가치관 속에서도 오로지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힘으로 남아 있는 우리의 ‘어머니’를 주제로 택한 것은 이번 전시와 출판이 작가 개인에게는 80년 인생을 돌아보는 내면으로의 여행이자 회귀이기도 하지만 무질서하게 무너지는 우리 사회의 근간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미임을 시사해준다.

윤주영 선생은

하루 한 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는 철저하며 부지런한 성품으로 편안함 대신 고단한 완벽주의를 선택해온 선생은 80평생 여러 직책에 있었지만 항상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1928년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하여 20대 후반에 중앙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30대 초반에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장, 30대 후반에는 민주공화당 대변인, 40대에는 칠레 대사, 청와대 대변인, 문공부 장관, 국회의원으로, 그리고 50대에 이르러 사진가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선생은 인생 후반 30년을 사진작업에 전념해왔다. 개인전과 사진집 출간의 횟수가 말해주듯 선생은 평생 사진만 해온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작업과 왕성한 발표로 열정적인 사진가의 삶을 살아왔다.

선생이 50대 초반에 세상의 화려한 이력을 버리고 카메라를 들었을 때 호사가의 취미 정도로 끝나리라 점쳤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타고난 성품대로 이번에는 사진창작이라는 대상과 진지하게 정면승부를 벌였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문화유적들을 중심으로 촬영했으나 곧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역시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간’이었고, 인간이 살아내야 하는 ‘삶’이었다. 이미 대학시절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향리’라는 소설로 당선된 적이 있는 문학적 소양이 사진으로 넌픽션을 쓰게 했던 것이다.

1987년에 나온 첫 번째 사진집 “내가 만난 사람들”과 그 이듬해에 나온 “다시 만난 사람들”은 제목에서 풍기는 그대로 ‘만남’의 시리즈였다. 쉰 살이 되도록 언론과 政官界에서 열성적으로 일과 부딪쳐온 선생이 이제는 인생을 관조하는 시선으로 사진이라는 새로운 장르와 만나고 카메라를 통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만나고 아울러 영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세상과 만나고 있음을 보여준 기록들이다. 그리고 1990년에 세 번째 사진집인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일본에서 제15회 이나노부오상을 수상하면서 사진인생 10여 년에 한 획을 긋는다.

이 수상은 늦은 나이에 시작해 당당한 사진가가 되었음을 공인 받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 사진집을 끝으로 작업의 주제가 비로소 우리 민족과 역사, 사회로 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네 번째 사진집 “동토의 민들레”도 사할린에서 촬영한 것이긴 하지만 그 대상은 우리 민족이었다. 이어 1994년에 발표한 “탄광촌 사람들”은 본격적인 국내촬영의 결과물로서 이젠 선생 자신이 국내에서 사진가임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선생 자신도 밝힌 바 있지만, 정계에서 은퇴 후 처음 사진기를 들었을 때는 국내에서 촬영하기가 쑥스러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외촬영을 하면서 보편적인 인간애에 머무르며 만족하기에는 선생의 카메라 아이(camera eye)가 너무나 진지하고 현실감각이 강했다. 선생은 곧 우리 내부의 문제에 깊이 파고들어, 해방 후 귀국하지 못한 사할린 동포, 베트남 참전의 후유증인 라이 따이한, 사양산업으로 기울어가는 탄광촌, 장애 어린이들, 노동의 신성함을 다룬 일하는 부부들, 우리 사회의 버팀목인 어머니의 세월을 사진으로 서술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 “베트남 전후 20년”, 1997년에 “어머니의 세월”, 1998년에 “일하는 부부들” “어머니의 세월-개정판”, 1999년에 “중국-개혁과 개방의 바람” “안데스의 사람들”, 2001년에 “행복한 아이들” “장날”, 2003년에 “석정리역의 어머니들”, 2004년에 “그 아이들의 평화” 등 계속해서 출간된 선생의 사진집은 항상 우리 사회에 던지는 강한 메시지였다. 이 사진집들은 대규모 사진전에 맞추어 발간되었는데 특히 조선일보사 미술관에서 열린 “베트남 전후 20년” 展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베트남 참전 당시 베트남 여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 라이 따이한들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자라서 청년이 된 모습은 우리가 ‘가해자’임을 확인하는 기록물이란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사할린 동포나 정신대 할머니의 문제처럼 늘 역사의 피해자로서 익숙한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가해자란 점에서, 그 사진전을 보는 우리가 그들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던 것이다.

선생의 사진은 정직하다

그래서 힘이 있다. 우회하지 않으며 정공법으로 승부를 건다. 기교로 비켜가지 않는 표현기법은 선생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결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거나 우물거림이 없이 또박또박 사진으로 말을 걸어온다. 행여 못들은 척 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할 수 없게끔 선생의 사진은 분명하고 명확하며 솔직하다. 작가의 그러한 태도는 자신을 다 내보일 자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폭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확하고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 인간적인 예의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이러한 다큐멘터리가 성립될 것이다.

영국에서는 젊은 시절에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후 나이가 들어 판사에 임명된다고 한다. 법의 잣대로만 재단하기에는 실로 복잡하고 섬세한 인간사인지라 그 만큼 많은 경험과 수련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먼저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 즉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재판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큐멘터리 사진도 그럴 것이다. 결코 사진기술이나 사진지식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될 복잡다단한 사회적인 문제와 섬세하면서도 심오한 인간 내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므로 다큐멘터리 사진은 예술 이전에 인간이 먼저 보여야 하는 장르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가장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출발한 셈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것은 고달프다. 다큐멘터리의 첫 글자 D가 3D의 D를 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렵고 힘들다. 특히 인간과 부딪침을 두려워하는 젊은 세대들에겐 버겁고 무거운 장르라서 가볍고 화려한 사진으로 몰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사진가의 노력과 인격과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숨을 곳이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특징 때문에 점점 기피 종목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선생은 그러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특성이야말로 사진이 갖는 매력이며 힘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작가정신으로 세상에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는 상징적인 메타포보다는 단도직입적이며 명료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한다. 메시지의 표현방법은 강직하되 선생의 사진은 따뜻하다.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촬영한 소재가 팔 다리가 없는 장애아이든 아니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든 선생은 그들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포착하며 그들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선생은 왜 사진을 찍는가?

아마 은퇴 후에 글을 먼저 쓰기 시작했다면 글 쓰는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운명적으로 때마침 카메라를 들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다. 문화예술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데에다 약 4년간 문공부 장관으로서 문화정책에 깊게 관여하고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중에 은퇴하면 카메라를 메고 전국을 주유하며 문화유적들을 촬영하자는 생각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런데 은퇴 후 선생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촬영한 사진을 본 주변의 사진가가 ‘카메라 아이’가 좋다며 권하는 바람에 용기를 내어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은 사진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30대 이후 선생이 일한 언론사와 政 官界는 가장 현실적인, 하루하루 변화하는 사회에 가장 민감하고 치열한 일터였다. 매 시간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결단을 내려야 하는 최전방에서 20년 간 늘 시간을 다투며 전투적으로 일해 온 선생에게는 직책에서 물러남은 가능해도 일에서의 은퇴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끝없는 열정을 갖고 사회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개인 작업으로 다큐멘터리 사진 만큼 적합한 분야가 어디 있겠는가.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적절한 주제 선택과 치밀한 기획력, 끈기 있는 어프로치, 작가의 생각을 순간적으로 영상으로 옮길 수 있는 순발력, 그리고 설득력을 발휘하여 낱개의 사진을 한 권의 책으로 혹은 전시로 펼쳐 보일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선생에게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서너 시간 밖에 잠들지 않는 선생으로서는 나머지 긴 시간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기획하고 촬영하고 암실작업을 거쳐 나온 사진들을 선별하여 트리밍하고 그것을 단어 삼아 한 문장으로, 한 챕터로, 한 권의 책으로 구성하는 고된 사진작업을, 고행하듯 혹은 차라리 고행을 즐기듯 그렇게 해온 것이다. 생전에 사모님이 “사진 안 하셨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날마다 밤늦도록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도 질리지도 않나 봐요. 사진이라는 것이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분야니까 망정이지...”라고 하던 말씀이 생생하다.

윤주영 선생은 참 행복한 분이다

2003년 12월에 사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 수 년 간 두 분을 뵐 때마다 “이렇게 내조를 잘 하시는 부인을 두셨으니 정말 행복한 분”이란 생각을 했었다. 의학박사이고 산부인과 병원 개업의였지만 선생이 정계로 나서자 괜히 잡음이 일 것을 염려하여 병원문을 닫고 내조에만 전념하셨던 사모님 권옥순 여사는 선생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가장 적합한 도움을 줄 줄 아시는 현명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10년 전 쯤이었던가, 선생을 모시고 광주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광주에서 사진가 강봉규 선생의 안내로 화순에 갔다가 그 동네 농악대의 상쇠 노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박하고 전통적인 장례가 치러진다는 걸 듣고 선생은 그날 밤 서울에 전화를 했다.

“내일 아침 10시 반까지 광주 *** 호텔로 슬라이드 필름 20롤과 비 올지 모르니 골프 우산 챙겨 보내라.”는 내용. 그 밤중에 어디서 슬라이드 필름을 구할 것이며, 아침에도 문을 일찍 열지 않을 텐데... 그러나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정확하게 주문한 물건들이 도착했다. 마치 불가능이란 없는 것처럼 사모님은 늘 조용하게 그러나 민첩하게 선생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셨다. 훌륭한 어시스턴트인 사모님을 뵈면서 선생은 행복한 분이지만 사모님은 좀 손해 보시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사모님이 돌아가신 몇 개월 후 댁을 방문했을 때 그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거실에 사모님의 아름다운 영정사진이 놓여 있는데 그 아래 꽃 한 다발이 싱싱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생전에 워낙 꽃을 좋아하고 잘 가꾸신 사모님을 그리며 항상 꽃이 시들지 않게 바꿔놓는다 했다. “아, 부부란 이런 것이로구나!” 70대의 남편이 날마다 아내의 영정사진 아래 아름다운 꽃을 올려놓는 모습을 상상하며 순간 가슴이 울컥하면서 감동이 밀려왔다.

평소에 너무나 철저하고 완벽하고 꼼꼼하다보니 때로 고집스럽고 근엄하게 비치기도 했던 선생에게 날마다 아내에게 꽃을 바치는 순애보가 있었다는 사실이 의외였지만 금방 수긍이 갔다. 완고함 속에 따뜻함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야말로 힘들고 고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끝없는 신뢰가 없다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신념이 있기에 선생은 오지에서부터 저 땅 속 검은 탄광굴까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둠을 밝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세상을 바꾸고 삶을 바꾸려는 애정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라고 했다

선생이 사진가로서 많은 전시와 출판을 통해 사진문화발전에 끼친 영향도 크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사진박물관 건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강원도와 영월군이 2005년에 동강사진박물관을 건립하고 그보다 앞서 2002년부터 해마다 동강사진축제를 열어 비로소 정부의 지원을 받는 번듯한 사진축제를 탄생시킨 중심에 선생이 있다.

아니, 선생은 모든 일에서 항상 중심에 서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하다못해 술좌석에서든 선생은 늘 중심이었다. 이는 또한 일을 추진하는 데에 있어 언제나 소신이 명확하고 의지가 굳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단독주택에 거주할 때 절대로 리모콘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나가서 직접 대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던 소신부터, 은퇴 후에도 한 자리를 맡아달라는 여러 번의 제의를 과감하게 거절한 소신까지 선생은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선생은 올해 팔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촬영 중이고 다음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선생에겐 이번 ‘어머니’ 작업 역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더구나 올봄에 손녀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함으로써 선생은 한국사진에 의미 있는 씨앗을 심은 셈이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앞으로 10년 후에 선생의 90세를 기념하여 손녀 희선이와 함께 하는 사진전이 기획될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글=윤세영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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