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신의나의골프>5.14세부터 美전역에 이름 떨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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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981년 나는 벨플라워중학교 2년생이 됐다.이곳 교육제도상중학교까지는 골프팀을 두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의 지원없이 나혼자 연습을 해야했다.물론 공부도「골프 때문에」라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여름방학 전에도 휴일과 국경일에는 이곳 저곳에서 시합이 벌어지면 빠짐없이 참가했고 방학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시즌을 맞았다. 이 해에 처음 참가해 자신감을 주었던 옵티미스트 주니어 월드대회에서 드디어 우승을 차지했다.내 또래 아이들 중에는 내가 단연 강자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라 자부심도 컸고 2년전 아빠와의 약속도 지킬 수 있어 매우 기뻤다.
이어서 매년 미국 서부 13개州및 멕시코.캐나다등의 대표들이대결하는 아메리카컵 팀경기에 캘리포니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됐다.아메리카컵에는 이후 4년동안 매년 출전했는데 항상 우리 캘리포니아는 우승을 도맡아 놓고 했다.
만 14세가 채 되기전에 캘리포니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 출전,당시로선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이 타이틀은 다음해까지 지켜졌다.79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던 미국 올스타도 매년 빠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미국 전역의 골프 애호가들에 게 나의 존재는 알려지게 됐다.
이 시절 경기를 하면서 이곳 아이들에게 생겼던 의문이 있었다.성적이 좋으면 물론 이곳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나쁘다고 속상해하는 아이들은 없었다.특히 아메리카컵 경기 같은 단체전에서 부진하면 동료에게 미안한 기색이라도 보여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가않았다. 아버지도 성적에는 관대했지만 경기 내용이 나빴거나 실수한 스윙이 있을때는 반드시 돌아오는 차에서 상황을 설명하라고말씀해 나는 대답을 준비하는데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소년 시절에 완전을 추구하기보다는 제일 잘한 플레이가 주는가능성만 산다는 그들의 낙관적인 생각과 함께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부모들의 배려가 더 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보였던 골프에 대한 나의 집중에는 전통적인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인 차이와 함께 아직까지도 이국땅에서 느껴야하는 어쩔수 없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는 남다른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골 프에 전념하던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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