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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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그 뒤론 몇달 동안 남자를 사귀지 않았어.애들하구 어울려서 또 약두 하구 마리화나두 먹구 그랬지만,어쨌든 남자애하고 같이자구 그런 건 안했어.
새로 사귄 남자애는 이름이 정찬이었어.아니야,정찬이는 그런애가 아니야.아빠가 소개시켜준 남자앤데 나보다 두 학년 위였어.
그러니까 그 사람은 12학년이었지.그렇지만 처음엔 내가 이것저것 미국에 대해서 많이 가르쳐줬어.정찬인 아빠 친 구의 아들인데… 걔네 식구가 몽땅 미국으로 이민을 온 거였거든.그래,걔네집은 막 이민온 거였다니까.
굉장히 착한 남자애였어.공부도 잘했구.그리구 날 좋아했어.정말이야.이때까지 정말로 날 좋아했던 남자앤 아마 정찬이밖에 없을 거라구.그런 건 금방 알 수 있는 거잖아.진짠지,그냥 같이자구싶어서 그러는 건지 그런건 그방 알 수 있는 거잖아.알지…? 그래,정찬인 정말이었다니까.우린 여러번 영화구경도 같이 가구 그랬지만 그앤 손 한번 잡으려고도 하지 않았어.그 사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러니까… 자기는 데이비스라는 데 있는 주립대학에 갈 거라는 거야 .
거긴 농과대학이 유명한데 거기 가서 쌀농사를 공부하겠다는 거야.무슨 뜻인지 알겠니? 우리 주식이 쌀인데,쌀이 미국쌀 보다안좋으니까 농민들이 어려워진다는 거야.
정찬이는 자기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쌀을 개발해서 한국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거였어.그래서 아무리 외국쌀이 수입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쌀만 찾도록 만들겠다는 거였다구.어쨌든 정찬이는 그런 애였다 이거야.보통 남자애는 아니었다는 내 말 알겠지.걘 훌륭한 남자애였단 말이야.
집도 멀지 않아서 가끔씩 느닷없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집에 와서 나하고 이야기하다가 가고는 했었거든.근데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와서 나한테 현관에서 무슨 쇼핑백 하나를 주고 그냥 가는거야.집에 들어오지도 않구.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알아.치약 하나 하고 편지하구… 어쨌든 편지를 까보니까 이렇게 써 있었어.
「희수,넌 잘 웃고 쉬지 않고 조잘거리고 그러는 게 참 예쁜애지만,아무도 너를 안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네 얼굴은 다른얼굴이야.난 네 그런 얼굴을 여러번 훔쳐보았지.어제도 그랬어.
넌 네 엄마의 애인 이야길 하면서 깔깔대고 웃 었지만,나를 배웅해주고 서 있던 널 다시 한번 돌아봤을 때의 네 얼굴은 다른얼굴이었거든.
이건 치약인데,설명문을 보니까,기분이 울적할 때 이 치약으로이를 닦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거야.그래서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산 거야.또다른 건,알겠지만 폭죽이야.잠 안오는 고요한 밤이나 갑자기 기분이 좋고 싶을 때 꼬리를 잡아 당기란 말이야.빵하고 터지면서 색색의 테이프가 날릴 거야.그러면 뭔가 기분이 좀 달라질 거야.안녕.」 그런 남자애한테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이건 정말 내가 말도 안되는 짓을 한거야.집에 아무도없을 때였는데,난 하이를 먹구 잔뜩 올라가지구 정찬이를 집으로부른 거야.그래서 그 사람을 내 침대로 데리구 간거야.난 정찬이도 날 원 한다구 생각했거든.난리였어.정찬인 어쨌든 한동안은내가 하자는대로 옷도 벗구 그러다가…,어쨌든 그 사람은 한순간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옷을 주워입구 가버리는 거야.내가 가운을 걸치구 현관까지 뛰어가봤지만 그 사람은 벌써 가버리 고보이지 않았어.
침실의 흐트러진 침대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데 눈물이 질질 흘러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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