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타인과의 소통과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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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300부 정도 만들어 친지들에게 선물하려 했는데 출판사에서 강하게 요청을 하는 바람에…”

약간 쑥스러운 표정이다. 자진해서 농부가 된 철학자 윤구병(64·사진) 전 충북대 교수. 자신의 첫 저서인 철학우화 『모래알의 사랑』(보리)을 20여 년만에 다시 낸 경위를 설명하며 얼굴을 붉힌다.

1982년 선보였던 책은 그가 사회변혁을 욕망하던 이들의 의식화 교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키 작은 모래알이 실오라기와 물방울을 만나 사랑하는 법을 익힌다. 거기 그 자연스런 가락에 줏대 없는 지식인의 초상이나 건강한 민중성의 상징이 실렸다.

“곧게, 떳떳하게 살자고 들어도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는걸”(실오라기)

“우리와 달랐던 것, 우리보다 낫다고 믿었던 것, 우리보다 더 몸집이 크거나 무게가 있었던 것, 하나같이 모두 슬그머니 주저앉고 바다에 이른 것은 우리뿐이었어. 우리끼리 해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물방울)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연대하고 사랑하는 것의 소중함이죠.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라 믿습니다”

그의 눈빛이 형형하다. “또 다른 물방울과 어울리려면 버리거나 나누어야 하는 거야”(64·65쪽)란 그의 믿음은 구두선이 아니다. 실제 행동으로 보여준다. 95년 정년이 보장된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변안군 변산으로 농사지으러 들어갔다. “행복하지 않아서…”라고 눙치지만 여간해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함께 땀 흘리며 더불어 사는 변산공동체에서 흙과 씨름한 지 12년. 대안학교를 일구고 “가난한 유기농가와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 올 5월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문턱 없는 밥상’과 재활용품을 파는 ‘기분 좋은 가게’를 열었다. 적지 않은 자신의 인세를 모두 쏟아부은 재단법인을 통해서다. 나누고, 그러기 위해 버리는 삶이다.

“일주일에 사흘은 서울에 와 토박이 출판사, 보리 출판사, 월간 직장인 일을 거드니 반거충이 농사꾼이지요. 우리 공동체에선 땀 흘려 일하지 않는 불한당(不汗黨)을 용납하지 않는데 고맙지요” 그래도 흙일을 한 탓인지 그의 손가락 마디 마디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없을 정도로 굵직하다. 그런 그가 요즘 공을 들이는 ‘남북 어린이를 위한 초등 국어사전(가제)’ 편집이다. 이번 책의 삽화를 그린 그 굵은 연필로 그가 또박또박 정리한 어린이사전도 틀림없이 건강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글=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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