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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보스턴 심포니 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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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6월 10일 보스턴 도심을 가로지르는 고가 철도 공사 계획안이 메사스추세츠 주의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파크 스트리트 교회 건너편의 보스턴 뮤직 홀은 철거 위기에 놓였다. 몇 달전부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집없는 떠돌이 신세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었다. 보스턴 심포니는 1881년 창단 이래 줄곧 이곳에서 연주해왔다.

보스턴 뮤직 홀은 1852년 하버드 음악 협회가 희사한 10만 달러로 지은 음악당이다. 외부는 우중충했지만 내부엔 아폴로, 다이애나, 아데나, 헤르메스, 아마존,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 등의 조각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됐다. 1862년에는 6만 달러를 더 모금해 독일 발커사가 제작한 파이프오르간까지 갖췄다. 파이프 5474개로 당시 미국 최대 규모의 오르간이었다. 이 오르간은 현재 메사스추세츠 주 메두엔 기념 뮤직 홀로 자리를 옮겼다.

보스턴 심포니 정기 회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헨리 리 히긴슨(1834∼1919)는 기다렸다는 듯이 콘서트홀 신축 계획을 발표했다. 정기 회원들로부터 40만 달러에 상당하는 기부금을 약속받았다. 당시 보스턴은 불황으로 파산자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새 음악당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히긴슨은 보스턴 심포니의 창설자이자 보스턴 뮤직 홀의 최대 주주였다.

심포니홀 산파 역 맡은 히긴슨, 맥킴, 새빈

히긴슨은 하버드대 재학 중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곧 연주자의 꿈을 접었다. 도중에 손가락을 다친 데다 남북 전쟁으로 입대 명령까지 받았다. 보스턴으로 돌아온 그는 동광(銅鑛), 철도, 금융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보스턴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하나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실천에 옮겼다. 연간 8개월간 전문 연주자들로 상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 것은 1881년 당시 미국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고가 철도 계획이 발표됐지만 히긴슨은 눈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1892년 이미 신시가지 개발 구역인 백 베이에 68.6×45.7㎡ 크기의 부지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백 베이는 1852년까지만 해도 갯벌이었다. 1880년대 들어 주택가가 형성되었고 보스턴 아동 병원 등 굵직한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스턴 공공 도서관(1895년), 매사추세츠 역사 학회(1899년), 원예 홀(1901년), 뉴잉글랜드 음악원(1901년),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1903년), 조던 홀(1904년), 하버드 의대(1906년), 보스턴 미술관(1909년) 등이다.

1892년 10월 27일 백 베이의 부지를 매입하기 전날 히긴슨은 찰스 폴렌 맥킴에게 친서를 보냈다. 아직 결정 단계는 아니지만 백 베이에 콘서트홀을 짓는다면 맥킴을 건축가로 지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공사비는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고도 못박았다. 맥킴의 작품인 보스턴 공공 도서관은 코플리 스퀘어에 공사 중이었다. 맥킴은 당시 미국 최고의 건축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1893년 11월 보스턴 시민들은 고가 철도 계획의 찬반을 묻는 투표에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보스턴 뮤직 홀은 철거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관객들의 불평은 막을 수 없었다. 보스턴 뮤직 홀은 큰 건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입구를 찾기 어려웠고 공연 시작 전에는 교통 혼잡이 심했다.1881년 히긴스가 이 건물을 인수할 때도 건물을 두 개로 쪼개어 사이에 골목을 내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출구는 위험했고 공연장 내부는 환기 시설이 없어 연주 도중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음악회 뿐만 아니라 종교 집회, 강연회, 권투 경기, 댄싱 파티 등 잡다한 행사들을 유치해 이미지도 나빴다.

1894년 1월 맥킴은 콘서트홀 설계안을 공개했다. 고대 그리스의 반원형 극장을 모델로 했고 화려한 조각으로 꾸몄다. 언론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맥킴은 전통적인 건축 양식에 충실했고 화려한 디테일과 조각 장식으로 건물을 꾸미는 것으로 유명했다. 가능하면 고급 자재를 고집했다.

하지만 히긴슨은 지금껏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디자인으로‘실험’을 하기가 싫었다. 1898년까지는 꼼짝 않고 있었다. 보스턴 뮤직 홀 철거 계획도 백지화된 데다 경제 사정도 어려웠다. 경기가 회복되자 보스턴 뮤직 홀을 인수할 사람이 나타났다. 1898년 10월 히긴스는 맥킴에게 18개월만에 콘서트홀을 완공하라고 주문했다. 건축비는 20만 달러를 넘으면 안되고 반원형 극장도 안된다고 했다.

새 콘서트홀 신축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보스턴 헤럴드 지의 음악 에디터를 지낸 프레드 베이컨은 뮤직 홀(콘서트홀)보다 오페라 하우스나 오페라ㆍ콘서트 겸용 다목적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킴은 히긴슨의 충고대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1884년 개관)을 모델로 설계를 끝냈다. 당시 미국의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는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로 손꼽혔다. 히긴슨은 뉴욕 카네기홀을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현대 음향학 법칙으로 지은 첫 콘서트홀

하버드대 총장 찰스 엘리엇은 히긴슨을 만난 자리에서 하버드대 물리학과의 젊은 교수 월레스 클레멘트 새빈(1868∼1919)을 음향 컨설턴트로 추천했다. 새빈이 하버드대 포그 미술관 강당의 음향 개선을 위한 연구를 의뢰받은 것은 1895년. 그의 나이 27세의 일이었다. 새빈은 학생들 사이에서 강의 잘 하기로 소문났지만 그 흔한 박사학위 하나 없었다.

반원형으로 설계된 미술관 강당은 강의실로는 부적합했다. 잔향시간이 너무 긴 데다 메아리까지 발생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새빈은 3년간 실험을 거듭했다. 새빈과 학생들은 매일 밤 샌더 시어터와 포그 강당을 오가면서 실험을 거듭했다. 어느날 밤 샌더스 극장에서 가져온 수백개의 의자 쿠션 덕분에 포그 강당의 잔향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관객 한 명이 의자 6개의 쿠션과 맞먹는 잔향 시간 감소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잔향 시간은 어떤 소리의 볼륨(음압)이 60㏈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초로 산정한 것이다. 새빈은 훌륭한 콘서트홀은 2초 내지 2초 25의 잔향시간이 필요하지만 강의실에서는 1초에서 약간 모자라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포그 미술관 강당의 잔향 시간은 측정 결과 5초 5였다.

새빈이 음향 컨설턴트 초빙을 수락한 것은 1898년 가을. 자신의 실험 결과가 나온 다음의 일이었다. 밤샘 실험 끝에 새빈은 홀의 용적(cubic volume)과 쿠션이 있는 객석수로 잔향시간을 계산해 내는 공식을 알아냈다. 흡음재의 면적이 넓을수록 잔향시간은 짧아지고 홀의 용적이 클수록 잔향시간은 길어진다는 것이다.‘새빈의 잔향 공식’은 현대 건축 음향학의 초석을 마련했다. 보스턴 심포니 홀은 현대 음향학 이론을 설계에 반영한 최초의 음악당이다.

맥킴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1560석)를 모델로 해서 2600석에 맞게 높이, 길이, 너비를 그대로 확대했다. 새빈은 홀이 너무 길고 천장도 너무 높다고 충고했다. 맥킴은 기존의 보스턴 뮤직 홀과 비슷한 규모로 설계안을 수정했다. 무대를 아예 프로세니엄 아치 뒷쪽으로 뺐다. 무대 전체를 목재 음향 반사판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소리가 객석쪽으로 잘 뻗어나가도록 했다. 건물 규격은 길이 38.1m, 높이 18.6m, 너비 22.8m다.

보스턴 심포니 홀은 빈 무직페어라인,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와 더불어 ‘세계 3대 음악당’으로 손꼽힌다. 음향이 뛰어나기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46년 보스턴 심포니 홀 벽면에는 새빈의 공로를 기리는 동판이 새겨졌다. ‘오랜 연구의 결과로 얻어진 음향학 법칙에 맞게 지어진 세계 최초의 음악당을 가능하게 한 건축 음향학의 선구자’라는 내용이다. 새빈은 심포니 홀이 성공을 거둔 덕분에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고 정교수 자격까지 얻었다. 하버드대 응용과학 대학원 원장도 지냈다.

콘서트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맥킴의 최종 설계안은 1899년 3월 완성됐고 6월 12일 공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개관 6개월전까지도 홀의 이름을 짓지 못해 건물 파사드의 마감 공사는 맨 나중으로 미뤘다. 이미 계단 장식물에는 BMH(Boston Music Hall의 약자)라는 이니셜이 새겨졌지만 보스턴 뮤직 홀의 새 건물주가 극장을 개보수해서 계속 쓰기로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1900년 4월 28일 보스턴 심포니가 베토벤의‘합창 교향곡’으로 보스턴 뮤직 홀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끝내기가 무섭게 인테리어 철거 공사에 들어갔다. 10월에는 보드빌 극장으로 재개관할 참이었다. 이 홀은 현재 ‘오르페움 시어터’로 뮤지컬 무대로 쓰이고 있다.

보스턴 심포니의 매지저 C A 엘리스는 ‘히긴슨 홀’이 어떠냐고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티켓 판매가 되면서 ‘심포니 홀’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00년 9월 20일 총공사비 77만 달러(대지 구입비 포함)를 들여 착공 17개월만에 완공됐다(보스턴 뮤직 홀의 건축비는 20만 달러가 넘지 않았다). 주주들은 공사비 마련을 위해 자금을 빌렸고 새 콘서트홀의 사용권을 10년간 히긴슨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히긴슨은 보스턴 심포니 홀의 책임자가 됐다. 하지만 세금 내고 인건비 내고 저당 이자 갚느라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연간 4만 달러를 내야 했다.

보스턴 심포니 홀의 첫 시즌 티켓(24회 공연)의 액면가는 7달러 50센트에서 12달러로 매겨졌다. 실제로는 모든 좌석이 경매에 부쳐져 특정 자리에 대한 프리미엄에 따라 더 비싸게 팔렸다. 얼마전 남편과 사별한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는 12달러짜리 티켓 2장을 무려 560 달러 주고 샀다. 2층 발코니 맨 앞쪽 A15, A16였다. 정기 연주회는 토요일 오후 8시에 열렸다. 정기 회원은 티켓 한 장으로 24회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히긴슨은 3층 발코니석(505석)은 연주 전날인 금요일 오후에 50센트짜리‘러시 티켓’으로 팔았다.

개관 공연은 1900년 10월 15일에 열렸다. 빌헬름 게리크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와 헨델ㆍ하이든 합창단이 바흐의 코랄‘우리에게 열심을 주소서’, 베토벤의‘장엄미사’를 연주했다. 합창단을 무대에 세우기 위해 1층 객석 앞쪽 5개 열의 의자를 치웠다. 보스턴 심포니 홀의 건축비를 댄 주주 400명은 무료로 입장했다.

개막 연주회가 끝난 다음 뉴욕 타임스 에디터 R W 애플은 “건축미나 음향 면에서 빈 무직페어라인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썼다. 뉴욕 이브닝포스트 지는 ‘콘서트홀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극찬했다.

맥킴의 당초 설계도를 보면 건물 바깥도 화려한 조각상으로 장식돼 있었다. 하지만 예산 절감을 위해 외부 장식은 과감히 생략했다. 지붕도 슬레이트 대신에 동판으로 마감했다. 멀리서 보면 벽돌로 지은 곡물 창고나 무기 창고, 아니면 기차역 같다.

‘음악의 아테네 신전’

예산 부족으로 개관 당시에는 16개의 벽감(壁龕. 건물 벽면을 파내어 조각품이나 장식품을 놓도록 만든 곳)은 맨 뒤 아폴로 벨베데레만 제외하고는 텅비어 있었다. ‘심포니의 친구들’200명이 좌우에 양쪽에 각각 6개, 뒷쪽에 4개의 모조 석고상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했다. 10명은 신화 속의 인물이고 6명은 실제 인물이다. 카프리오니 형제가 석회로 복제한 조각품이다.

객석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무대 가까운 쪽부터 아기 바쿠스와 사티로스(나폴리), 키타라를 연주하는 아폴로 (로마), 헤르쿨라네움의 소녀(드레스덴), 춤추는 목신(로마), 데모스데네스(로마), 앉아 있는 아나크레온(코펜하겐), 유리페데스(로마), 베르사이유의 다이애나(파리). 왼쪽 무대 가까운 쪽부터 사티로스의 휴식(로마), 아마존(베를린), 헤르메스 로지오스(파리), 아테네의 렘니안(드레스덴, 머리는 볼로냐), 소포클레스(로마), 서있는 아나크레온(코펜하겐), 아이스키네스(나폴리), 아폴로 벨베데레(로마) 등이다. 19세기초 보스턴 출신의 윌리엄 튜더가 보스턴을 가리켜‘미국의 아테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처음엔 조각상이 남성의 은밀한 부위를 드러낸다고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아폴로 등 신은 그대로 놔두었고 역사상 실재 인물에게는 옷을 입혔다.

보스턴 심포니 홀은 단풍 나무로 만든 바닥을 제외하면 벽돌, 철, 회반죽으로 지었다. 프로세니엄 위에는 음악가의 이름을 새기기로 했는데 논란 끝에 베토벤 한 명만 써놓았다.

개관 당시 객석수는 2569석. 지금은 3층 발코니석이 505석에서 541석으로 늘어나 모두 2625석이 됐다. 팝스 콘서트 때는 1층 바닥에 의자를 치우고 241개의 원탁을 놓기 때문에 2371석으로 줄어든다. 팝스 콘서트를 위해 의자를 빼는 데 예전에는 8일 8시간(200시간)이 걸렸다. 요즘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6시간이면 충분하다. 가죽 의자는 1900년 당시의 것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심포니 시즌과 팝스 시즌이 끝나면 스쿼시 경기, 리셉션, 무용, 패션쇼, 자동차 모터쇼 장소로도 사용된다. 1943년에는 장개석 총통 부인을 위한 만찬, 1945년에는 공산당 집회가 열렸다.

개보수 공사도 여러 차례 했다. 1949년 개관 50주년, 바흐 서거 200주년 기념으로 새 파이프 오르간(파이프 5130개)을 설치했다. 가볍고 명료한 사운드를 추구하는 경향에 따른 것이다. 1900년 보스턴 출신의 조지 허칭스가 설계한 파이프 오르간은 너무 무거운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파이프 가운데 60%는 재활용했고 600개는 새 것으로 교체했다.

1973년 에어컨을 설치하면서 출입구를 건물 왼쪽으로 냈다. 1981년에는 사무실, 1990년에는 기념품 가게와 전시장, 식당 등의 부대 시설을 확충했다. 2006년에는 25만 달러를 들여 낡은 무대 바닥을 교체했다.

◆공식 명칭: Boston Symphony Hall

◆개관: 1900년 10월 15일

◆건축가: Charles Follen McKim

◆음향 컨설턴트: 월리스 클레멘트 새빈 Wallace Clement Sabine

◆객석수: 2625석(팝스 시즌 2371석, 만찬회 800석)

◆파이프 오르간: Aeolian Skinner

◆홈페이지: www.bso.org

◆상주단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음악감독 제임스 레바인),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지휘 키스 로카트), 헨델ㆍ하이든 소사이어티

◆부대시설: 심포니 카페(오후 5시30분∼7시45분. 음료 포함 뷔페 32 달러)

◆주소: 301 Massachusetts Avenue, Boston

◆전화: +1 (617) 638-9288

◆세계 초연:
1925 코플랜드‘극장을 위한 음악’
1927 코플랜드‘피아노 협주곡’
1930 프로코피예프‘교향곡 제4번’
1932 거슈윈‘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랩소디 제2번’
1934 거슈윈‘아이 갓 더 리듬 주제의 변주곡’
1936 알프레도 카셀라‘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3중 협주곡’
1940 힌데미트‘바이올린 협주곡’
1941 윌리엄 슈맨‘교향곡 제3번’, 힌데미트‘첼로 협주곡’
1942 마르티누‘교향곡 제2번’
1943 마르티누‘바이올린 협주곡’
1944 바르톡‘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쇤베르크‘주제와 변주곡’, 스트라빈스키‘4개의 노르웨이 분위기’‘서커스 폴카’, 바버‘교향곡 제2번’
1945 메노티‘피아노 협주곡’, 마르티누‘교향곡 제3번’
1946 바버‘첼로 협주곡’, 코플랜드‘교향곡 제3번’
1948 코플랜드‘녹스빌: 1915년의 여름’
1951 오네게르‘교향곡 제5번’
1955 마르티누‘환상 교향곡’, 피스톤‘교향곡 제6번’
1980 번스타인‘관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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