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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고원을넘어서>3.吐魯蕃-飛沙走石의 사막 西遊記무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7월17일 저녁 돈황을 떠난 우리일행은 柳園이란 조그마한 역에서 투루판(吐魯蕃)으로 가는 밤열차를 탔다.기차가 하미(哈密)시를 지난지 얼마 안돼 갑자기 북쪽으로부터 강한 모랫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열어놓은 차창으로 좁쌀알만한 모 래들이 마구날아와 막 잠이든 우리들의 얼굴이며 옷이며 배낭위로 쌓이기 시작했다.일어나 급히 창을 닫았으나 입안은 온통 모래로 서걱서걱했다. 아! 이것이 그 유명한 사막의「飛沙走石」이라고 했던가.
만약에 우리가 낙타를 타고 여행하던 隊商으로 한밤중에 잠자다 이같은 모랫바람을 만났다면… 과연 살아날수 있었을까.만감이 교차했다.투루판이란 위구르말로 「파인땅」이라는 뜻으로 동 서 1백20㎞,남북 60㎞의 아담한 분지다.이곳의 아이딩 호수는 지표가 해발 마이너스 1백50m로 중국에서 가장 낮으며,한여름 평균기온은 섭씨 40도,지면의 온도는 70도를 오르내리는 혹서의 지반이다.
또 서남쪽으로는「아시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타림분지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서역으로 진출하려는 漢과 이곳을 지키려는 여러 유목민족간의 끈질긴 투쟁 지역,天山산맥의 북과 남이 갈라지는 중요한 길목인투루판은 人口 17만명,그중 위구르인은 70%인 12만명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10㎞지점에는 화염산(火焰山)이 있다.우리가 가던날이곳은 섭씨 48도,지표온도 80도로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듯이 뜨거웠다.
이 산은 예부터 여행자들이 접근하기 두려워해 아직까지 아무도오른 사람이 없다고 한다.
『西遊記』에서는 孫悟空이 鐵扇公主로부터 芭蕉扇을 빌려와 불을끄려 했다 하여 火焰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돼있다.
이 화염산 건너편에 깎아지른 절벽 중턱을 뚫어만든 둥굴사원 베제크닉千佛洞이 있다.6세기부터 14세기까지 번성했던 이 사원에는 위구르人들이 그린 화려하고 섬세한 벽화.불상들이 있었으나11세기 회교도들의 침략과 20세기초 각국 탐험 대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현재의 투루판현에서 동쪽 46㎞지점에 高昌故城이 남아있다.성벽의 높이12m,면적1.5평방㎞로 비단길에 남아있는 유적중 규모가 가장 크고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이란계人들이 살고 있었으나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漢族들이 중원의 혼란을 피해 대거 이주해와 토착민들과 공존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흉노족인 북량(北량)망명정권이 高昌을 탈취했고,북량은이후 몽고계의 유연(柔然)에게 멸망당했으며 이후 漢族왕조인 高昌國이 독립하여 7세기 전반까지 번성하였다.
수도는 高昌城이며 交河城도 그 세력아래 두었다.삼장법사로 더잘 알려진 당나라 고승 玄장이 인도로 갈때 高昌王의 호의로 이곳에 한달간 머무르면서 설법을 하고 간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高昌故城에서 서쪽으로 약 60㎞ 떨어진 곳에 交河故城이있다. 서로 교차하는 두강을 사이에 끼고 높은 절벽위에 세워진交河城은 천애의 요새로 난공불락을 자랑했다.
***天山 눈녹은 물로 경작 중국의 도시가 대부분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이 보통인데 交河城은 20m의 절벽위에서 밑으로 파내려가 도시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그래서「彫刻의 都市」라고도 불리는 交河城은 세계 다른 곳에서는 거의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투루판은 연간 강우량이 30㎜,증발량이 그 1백배인 3천㎜나되는 혹독히 가문 지방이다.
그러나 天山산맥으로부터 눈이 녹은 물을 지하관개수로로 이용해농사를 짓고 있었다.「카레츠」라고 하는 이 관개수로는 사막곳곳에 우물을 파서 서로 연결한 수로로 2천년이상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중국 최대의 포도생산지로 연간 2만8천t을 생산해 건포도와 포도주를 만들어 수출하고 있는데 그 맛이 아주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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