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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순례] 루체른 KKL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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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음악계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는 겨울 시즌의 입장객은 매년 줄어들지만 여름 페스티벌은 해마다 늘어난다는 점이다. 쾌적한 자연환경과 유서깊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면 음악제가 열리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바이로이트ㆍ베로나ㆍ뮌헨ㆍ사본린나ㆍ액상 프로방스ㆍ글라인데본ㆍ잘츠부르크 등 유럽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음악제가 오페라 축제인데 반해 루체른 페스티벌은 교향악단 위주로 꾸며진다. 스위스 취리히 국제 공항에서 기차로 70분이면 도착하는 호반 도시 루체른. 1936년부터 이곳에서 음악제가 시작된 것은 히틀러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후 히틀러에 반대하는 토스카니니 등 세계 정상급 지휘자들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서기를 거부하거나 출연 금지 조치를 당했다. 이들이 잘츠부르크 대신에 루체른으로 향했다. 교통이 편리한 알프스 산자락의 호반 도시라는 훌륭한 입지 조건 때문이다.

세계적인 음악가들, 나치 때문에 잘츠부르크 대신 루체른 행

루체른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1866년부터 6년간 살면서 오페라‘마이스터징어’‘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한 곳이어서 오페라와 인연이 깊지만 변변한 오페라 극장이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교향악단과 독주자의 협연 위주로 음악제를 꾸몄다. 아이러닉한 일이지만 제1회 루체른 음악제는 히틀러가 총애했던 작곡가 바그너가 살았던 호숫가의 빌라 트립셴(Triebschen)에서 열렸다. 이 빌라는 현재 바그너 박물관으로 꾸며져 관광객과 바그네리안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71년 화재 이후 1989년 새 건물로 단장한 루체른 중앙역. 이곳에서 걸어서 2분이면 KKL에 도착한다. KKL은 Kultur- und Kongresszentrum Luzern의 약칭. ‘루체른 문화ㆍ컨벤션 센터’라는 뜻이다. 루체른의 명물인 카펠 다리에서 100m 거리에 있다. KKL에서 호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이는 쪽에는 고급 호텔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산과 호수, 강으로 둘러싸인 인구 5만 7000명의 작은 휴양도시 루체른은 KKL의 개관과 함께 국제적인 문화도시로 급성장했다. KKL은 관광객을 위한 그림엽서에 등장할 정도로 루체른의 명물로 떠올랐다.

1998년 8월 19일 제60회 루체른 페스티벌 개막 공연은 루체른 중앙역 옆에 새로 지은 루체른 KKL에서 열렸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볼프강 림의‘In-Schrift’(1995년작)에 이어 베토벤의‘합창 교향곡’을 연주했다. 웨일스 태생의 베이스 바리톤 브린 터펠도 독창자로 무대에 섰다.

KKL 덕분에 루체른에는 음악 축제가 거의 연중 무휴로 열린다. 이곳에는 여름 휴가는 물론이고 부활절(4월)과 추수감사절(11월말) 휴가 시즌에 관광객을 겨냥한 음악제가 열린다.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는 주로 종교음악과 교향악, 추수감사절 축제에는 피아노 독주회 위주로 프로그램을 꾸민다. 피에르 불레즈가 예술감독을 맡은 현대음악 아카데미도 열린다.

첨단 공연장 신축으로 연중 무휴로 음악제 개최

매년 8월 중순부터 5주 동안 루체른 국제음악제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등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들이 출연한다. 2003년에는 음악감독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끄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설했다. KKL 덕분에 루체른 음악제는‘페스티벌 중의 페스티벌’로 우뚝 성장했다.

KKL은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의 설계, 미국 ARTEC사의 러셀 존슨의 음향 컨설팅이 빚어낸 작품. 우주선 모양의 음향 반사판이 별빛을 수놓은 듯한 홀 천정에 매달려 있고 석고타일로 된 내부 마감에다 문을 여닫아 잔향시간과 볼륨을 30%까지 조절할 수 있는 반향실을 갖췄다.

콘서트홀에서는 교향악단ㆍ합창단 뿐만 아니라 실내악ㆍ독주회ㆍ오르간 독주회도 열리기 때문에 공연 장르에 따라 담는 그릇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1개의 콘서트홀로 3~4개의 공연장을 갖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KKL에는 대극장ㆍ소극장이 따로 없다. 합창과 관현악이 어우러지는 대규모 공연이나 피아노 독주회나 최적의 음향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자 밑에 설치한 공기조절 시스템으로 완벽에 가까운 소음 방지 덕분에 관객의 기침이나 연주자의 사소한 실수 하나라도 객석 구석구석에 그대로 전달될 정도다.
천장을 5층 규모의 높였고, 발코니의 깊이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객석 규모도 음향이 좋기로 소문난 보스턴심포니홀.빈 무지크 페어라인잘의 장점을 살렸다. 콘서트홀의 무대는 호수 수면보다 낮다. 루체른 호를 오가는 보트의 엔진 소음을 피하기 위해서다.

알프스 산자락 호숫가에 정박한 ‘문화 유람선’

건축가 장 누벨은 로비는 물론 객석 내부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진한 보르도 적포도주 색과 청록색으로 꾸미려고 했으나 루체른 페스티벌의 출연진의 대표격으로 건축 위원회에 참가한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더 부드러운 색깔을 원했다. 그래서 실내 마감은 부드러운 흰색으로 결정됐다.

KKL이 들어선 자리는 호텔ㆍ우체국ㆍ미술관을 거쳐 1933년 아르민 메일리의 설계로 문을 연 공연장이 있던 곳이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줄곧 이곳에서 열려왔다. 하지만 거의 연중 무휴로 늘어나는 음악제를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1980년 이 ‘아트 앤 컨벤션 센터’ 건물에 치명적인 구조적인 결함이 발견됐다. 1988년 콘서트홀 건립을 위한 재단이 출범했고 출판업자 알리스 부커가 96만 스위스 프랑을 루체른 시에 기부하면서 공연장 신축을 위한 작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9년 설계 경기에서 프랑스 출신의 장 누벨이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루체른 시와 콘서트홀 재단은 제네바 출신의 루돌프 루셔의 설계안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아트 앤 컨벤션 센터’는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게 돼 건물을 아예 헐어버리기로 했다. 1994년 루체른 시의회는 65.7%의 찬성으로 9400만 스위스 프랑에 달하는 KKL 건축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루체른 주는 2400만 스위스 프랑의 예산을 따로 마련했다. 총공사비는 2억 500만 스위스 프랑(약 1400억원). 2001년까지 예산이 초과돼 결국 2억 2650만 스위스 프랑스로 집계됐다. 공사 기간 중 루체른 페스티벌을 대형 천막에서 치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루체른 중앙역에서 5㎞ 떨어진 제철소에 1800석짜리 임시 공연장을 마련했다.
건축가 장 누벨은 리옹 오페라 하우스에 이어 코펜하겐 심포니 홀을 설계했으며 2012년 파리 빌레트 공원에 들어설 파리 필하모니의 설계를 맡았다. 루체른에는 KKL와 함께 객실 25개, 레스토랑 5개짜리 부티크 호텔(www.the-hotel.ch)의 인테리어 설계를 맡아 화제를 모았다.

로비에 호수 물줄기 끌어들여

누벨은 애초에 호수 안에 공연장을 지어 배처럼 띄울 생각이었다.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거대한 유람선 모양의 설계안은 심사위원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했으나 시의회의 반대에 부닥쳤다. 시의원들은 호안선(湖岸線) 변경을 금지한 도시계획법과 생태계 파괴 등 환경 문제를 들고 나왔다. 결국 누벨은 한발짝 후퇴해 호수가 바라보이는 유람선 선착장 옆으로 장소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그가 남긴 말은 유명하다. “내가 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나에게 물이 흐르도록 하겠다.”

누벨은 호수 안으로 튀어나온 건물을 짓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호수의 물줄기를 공연장 로비까지 끌어들였다. 루체른홀 로비에서 콘서트홀 로비로 가려면 이 물줄기위의 다리를 두 번 건너야 한다. KKL은 공연보러 왔다가 실수로 이곳에 빠져 옷을 적시는 사람들에게는 세탁비를 지불하기로 했다.

평면에 가까운 넓은 지붕과 길이 30m짜리의 대형 칸틸레버(차양막)은 비나 햇볕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루체른 호수의 수평선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흡연실을 겸한 옥상 전망대에 서면 루체른 시가지와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KKL의 설계 컨셉트 중 하나는 투명성,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이다. 바깥은 안으로, 안은 바깥으로 향한다. 호수의 수면은 KKL의 지붕을 비추고, KKL의 지붕은 호수의 물결을 거울처럼 비춘다. 호수가 바라보이는 로비의 대형 유리벽에는 건축 기금 기부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2003년 루체른 시의회는 공연장 운영을 위한 종자돈으로 1800만 스위스 프랑의 예산을 승인했다.

◆공식 명칭: Kultur- und Kongresszentrum Luzern (KKL)

◆주소: Europaplatz 1, CH-6005 Lucerne, Switzerland

◆전화: +41 41-226-7070

◆홈페이지: www.kkl-luzern.ch

◆상주단체: 루체른 국제 음악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2003년 창단), 루체른 피아
노 페스티벌, 루체른 부활절 페스티벌

◆객석수: 콘서트홀 1840석, 루체른 홀 740석(스탠딩 800석, 세미나 330석, 연회 450석), 컨벤션센터 270석

◆개관: 1998년 8월 19일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 프랑스)

◆음향 컨설턴트: 러셀 존슨(ARTEC. 미국)

◆부대시설: 루체른 미술관, 레스토랑 RED, 월드 카페, Seebar, Waterfront

◆루체른 페스티벌 매표소: +41 41-226-4480 www.lucernefestival.ch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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