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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정치의 페론주의 유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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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07면

서울의 대척점(對蹠點)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부근이다. 대척점은 ‘지구 위의 한 지점에 대하여, 지구의 반대쪽에 있는 지점’(표준국어대사전)이다. 기후는 정반대고 시차는 12시간이다. 서로 대척점이라 그런지 양국은 대조적인 면이 많다.

안되면 미국 탓, 잘되면 페론 덕?

아르헨티나 정치는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1946~55, 73~74)이 남긴 정의사회주의(justicialism), 즉 페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인다. 페론주의는 권위주의ㆍ민족주의ㆍ포퓰리즘을 골자로 한다. 아직도 노동계급은 페론주의를 강력히 지지한다. 그들의 기억 속에 후안 페론과 부인 에비타는 서민과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헌신한 지도자다. ‘대중인기영합주의’로 번역되는 포퓰리즘은 아르헨티나에서 나쁜 사상이 아니다. 키르치네르도 빈민과 노동자를 동원한 관제 데모로 권력 기반을 다져왔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반미 성향이 강하다. 페론에게 강력한 인상을 준 것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즘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3월 브라질과 우루과이 등 중남미를 방문했다. ‘테러와의 전쟁’ 수행에 집중하느라 등한시해온 미국-남미 관계에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선봉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맞불을 놨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반미, 반부시’ 구호를 외쳐댔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해외 지도자는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다. 미국은 혐오와 불신의 대상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IMF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도 심하다. 2001~2002년 경제 위기를 부른 것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정책이었다고 믿는다. 크리스티나도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부채 상황을 만든 것은 하버드대에서 경제를 공부한 신자유주의자”라고 쏘아붙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친미, 혹은 미국적인 정책이 잘 성공하지 못한다. 76~83년에 아르헨티나를 통치한 군부는 독재에 반대하는 최대 3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신자유주의적 대외개방 정책을 폈으나 결국 실패했다. 페론주의자이면서도 집권 기간 중 친미 정책을 펴 세계를 놀라게 한 50대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89~99)은 2001~2002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렸다. 크리스티나가 집권하면 미-아르헨티나 관계가 호전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아르헨티나에 석유와 자본을 제공하고 있는 차베스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투자도 유치해야 한다.

크리스티나의 임기에 영향을 미칠 또 다른 전통은 중남미 특유의 마리아니스모(marianismo), 즉 ‘마리아주의’다. 마리아주의는 여성이 성모 마리아처럼 살기를 바라고 또 그런 여성을 숭상한다. 에비타는 빈민ㆍ병자ㆍ고아의 어머니였다. ‘21세기 에비타’로 불리는 크리스티나는 에비타와 마리아니스모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마리아니스모의 전통을 깨야 한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30%는 크리스티나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찍지는 않겠다고 한다. 얄궂게도 30%의 3분의 1은 여자다. 크리스티나는 여자가 나라를 맡으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기에 그 어깨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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